
사초 쓰는 심정으로…“난신적자 처단하라”
“사초를 쓰는 자세로 세심하게 살펴가며…특별검사의 직을 수행하겠다.”
추석 이후 후반기로 들어선 3대 특검의 수사를 재차 기대하며 조은석 내란특검의 취임 일성을 다시금 떠올린다. ‘사초 정신’의 강조이다.
그런데 ‘사초’하면 떠오르는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이 있다. 바로 ‘영조(재위 1724~1776)의 사초 소각(사건)’이다. 왜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영조와 사초 소각 사건’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어 ‘갑툭튀’하는가. 그 사연을 들어보자.
■심야의 사초 소각 사건
1735년(영조 11) 2월10일 밤늦도록 신하들과 탕평책과 관련된 격론을 펼치던 영조가 느닷없이 한 인물을 ‘소환’했다. 처조카인 ‘서덕수’(정성왕후·1692~1757의 조카)였다. 서덕수는 경종 재위 시절(1720~1724) 정국을 뜨겁게 달군 ‘경종 독살설’에 연루된 인물이었다.
“내(영조)가 서덕수를 거론하면 자연히 내전(정성왕후·서덕수의 고모)이 연루되지 않겠냐. 그렇게 되면 내전이 편안하겠느냐.”
신료들은 순간 ‘얼음’이 되었다. 영조의 발언에 브레이크가 없었다.
“(경종 독살설이 나왔을) 당시에 유언비어가 있었다. 내(연잉군·영조)가 부인(정성왕후)를 박대하고 주색에 빠져 있는데, 만약 내가 즉위한다면 반드시 ‘기사년의 일’(1689년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삼은 일)이 재발될 수 있다는…”

무슨 뜬금포인가. 영조가 갑자기 ‘중전의 폐위’를 거론했으니까…. 신료들은 영조의 발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우성쳤다.
“어찌 차마 듣지 못할 말씀을 하시냐”면서….
호조 판서 이정제(1670~1736)가 기막힌 제안을 한다.
“도저히 역사에 쓸 수 없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하교를 기록한 사초책을 불태워야 합니다.”
새벽 3시를 넘겨 신하들이 물러나자 ‘이 날의 일’을 기록한 사초책은 왕명으로 모두 소각됐다. 이것이 ‘심야의 사초 소각 사건’이다.
이 사건은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 사초책이 불태워졌으니, ‘중전의 폐위’ 발언의 의미를 두고 갖가지 억측이 나왔다. 기록이 사라진 후의 부작용이었다.

■목이 달아나도 사필은 굽힐 수 없다
3일 뒤인 13일 전직 사관인 이덕중(전 검열·9품)과 정이검(전 대교·8품)이 나서 비난 상소를 올린다.
“성상께서 사초 소각을 허락하시고, 좌우 사관들은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지요. 아!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사필은 굽힐 수 없다(頭可斷 筆不可斷)’는 옛말이 있습니다. 장차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될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8·9급 공무원의 서슬퍼런 비판에 영조가 쩔쩔 맸다. 영조는 “여러분의 말이 옳지만 이미 불탄 사초를 어찌 추후에 기록하겠느냐”고 후회했다. <영조실록>은 “영조가 이날의 일을 뉘우쳤으며 ‘사초를 불태운 것은 나의 명령은 아니었다’고 여러 차례 변명했다”고 전했다.
잿더미로 사라진 ‘1735년 2월10~11일의 영조실록’은 그날 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신하들의 증언을 토대로 추후에 재구성되었다.

■사초의 ‘마사지’ 시도
1733년(영조 9) 1월19일이었다. 영조는 노·론의 영수인 민진원(1665~1736·노론)과 이광좌(1674~1740·소론)를 밤중에 불러 당쟁을 비판했다.
또 자신이 이복형 경종의 독살설에 연루된 것을 두고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
“황형(경종)에게 후사가 있었으면…분수대로 산야에서 살았으리라…경종의 지극하신 우애를 입었다. 아! 당론이 날 모함하고 당론이 날 해쳤다.”

그러면서 오른손으로 이광좌의 손을, 왼손으로는 민진원의 손을 잡고 조정에 함께 머물러 달라고 했다. 이것이 노·소론의 영수를 불러 탕평책의 필요성을 역설한 ‘19일의 하교’이다.
이튿날 임금은 ‘19일의 하교’ 내용을 손수 한 통 써서 사관에게 주며 “역사 편찬에 참고하라”고 했다.
하지만 전날 밤 입시하여 영조의 하교를 기록한 사관 김한철(1701~1759)은 영조가 준 글을 읽어본 뒤 되돌려 주었다. 그러면서 일침을 놓았다.
“손수 써주신 글과 신(김한철)이 쓴 사초를 비교해보니 조금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군주가 글을 써서 사관에게 주어 역사편수를 지휘하면 훗날의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역사서의 초고
‘사초(史草)’란 무엇인가. ‘역사서(史)를 편찬하기 위해 기록해둔 초고(草)’라 할 수 있다.
예문관 소속 봉교(7품) 2명·대교(8품) 2명·검열(9급) 4명 등 전임사관 8명이 기록했다.(<승정원일기>를 쓰는 7품 관리인 승정원 주서도 사관에 속한다.)
전임사관은 1~2명씩 임금과 신하가 펼치는 정치의 현장에 참석하여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그렇게 쓴 초책 1부는 ‘춘추관(혹은 실록청)에 제출(입시사초)’하고, 또 1부를 따로 작성하여 ‘집에 보관(가장사초)’했다. 가장사초에는 인물이나 정치사안과 관련된 평가를 담아놓았다.
사초는 훗날 실록 편찬에 1·2차 자료로 활용되었다.

■사관의 잘못은 사형감
역사서는 왜 쓰는가.
사실 일반 백성들은 역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그러므로 역사를 배울 필요가 없었다.
무슨 말인가. 545년(신라 진흥왕 6) 이사부(이찬·1품)는 “국사(國史)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그들의 잘잘못(포폄·褒貶)을 후대에 보이는 것”(<삼국사기> ‘진흥왕’조)이라고 설파했다. 고
려 사관 최견(?~1437)은 1389년(고려 공양왕 원년) “사관의 임무는 임금의 언행과 정사, 백관의 옳고 그름과 득실을 모두 직서(直書)하여 후대의 교훈으로 삼는 것”(<고려사> ‘지’)이라 했다.

조선조 조박(1356~1408)은 “사관은 군주의 선악을 기록하여 만세에 남기니, 두려운 존재”(<정종실록> 1399년 1월7일)라 했다.
조선의 중흥군주 정조는 더욱 센 표현을 쓴다.
“…사관이 임금의 잘못을 기록하지 않으면 그 죄는 사형이다. 임금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그 잘못을 살펴 기록한다”(<홍재전서> ‘일득록·훈어’)고 했다.
그래서 ‘대간(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3사)은 한 시대의 공론이고, 사관(史官)은 만세의 공론을 정한다’는 말이 나왔다.(<광해군일기> 1613년12월3일·<중종실록> 1507년 6월17일·<고려사> ‘세가·공양왕4) 등)

■동호지필과 최저 3형제
‘직필’ 사관의 롤모델로 꼽히는 이는 고대 중국 진(晉)나라 역사가 동호(생몰년 미상)이다.
즉 진나라 어진 재상이었던 조돈(기원전 655~601)은 군주(영공·기원전 620~607)의 미움을 받아 죽을 고비를 겪고 국외 망명을 시도했다. 조돈이 국경선을 넘을 찰라 조천(조돈의 조카)이 군주(영공)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돈은 국경을 넘지 않고 급거 귀국했다.
그런데 당시 진나라 태사 동호는 “조돈이 군주인 영공을 시해했다”고 쓰고, 그 기록을 조정에 알렸다.
이에 조돈이 “범인이 조천인데, 내가 무슨 상관이냐”고 항변했다. 그러자 동호는 “재상인 당신이 도망쳤지만 국경을 넘지 않았고, 돌아와서도 시해범을 처단하지 않았으니 당신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조돈은 이 말을 받아들이며 “나랏일이 걱정되어 돌아왔거늘 결국 이런 죄명을 뒤집어 쓰는구나!”라고 탄식했다.

후에 공자는 “동호는 굽히지 않고 바른 대로 썼으니 흘륭한 사관이고, 조돈은 법을 위해 더러운 이름을 감수했으니 훌륭한 대신”이라고 두 사람 다 상찬했다. 이것을 ‘동호지필(董狐之筆·권세를 두려워 하지않고 기록’)이라 했다.
또 다른 ‘사관 3형제’가 있다. 제나라 장공 6년(기원전 586)의 일이다. 호색한인 장공은 신하 최저의 부인을 유혹하다가 그만 최저에게 살해 당했다. 제나라 사관은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崔杼弑莊公)”고 기록했다. 권력을 쥔 최저가 사관을 죽였다.
그러자 사관의 동생이 나타나 다시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고 썼다. 최저는 동생까지 죽였다. 이번에는 사관의 막내동생이 나와 역시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고 기록했다.
천하의 최저라도 막내동생 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지독한 직필 삼형제’가 아닐 수 없다.

■빠릿빠릿한 7~9품 사관
이렇게 ‘직필정신’으로 무장해야 했던 사관이었으니 그 자격은 엄정했다.
매일매일 군주와 대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직책이 사관 아닌가.
하급관리(7~9품) 중에서 젊은 패기로 무장한 빠릿빠릿한 전임사관 8명이 선발되었다.
“사관은 후세의 귀감이 되니 책임이 가볍지 않습니다…하급의 문관 가운데…경사(유교경전과 역사서)에 막힘이 없고 제술(시와 글)에 능한 자를 시험으로 뽑아야 합니다. 여기에 친족과 처·외가에 모두 흠결이 없는 자여야 합니다.”(<태종실록> 1417년 12월 4일)
그렇게 선발되었으니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특히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지 않았던 조선 초기 사관들은 국왕의 독주에 맞서 직필정신을 세우려고 사투를 벌였다.

■“사관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관이 홍여강·민인생 등이다. 태종이 누구인가.
1·2차 왕자의 난을 이르키며 이복동생을 죽이고, 동복 형까지 쫓아낸 무서운 군주 아닌가.
그런 천하의 태종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뭔가를 끄적대는 사관들 때문에 심사가 편치 않았다.
그중 사관 홍여강은 1401년 4월25일 “임금의 일상을 기록하겠다”면서 편전(보평전)에 들어서려 했다. 태종은 “편전은 내가 쉬는 곳이니 사관은 들어오지 말라”고 홍여강의 입시를 불허했다.
그렇지만 홍여강은 편전의 뜰 아래까지 진입했고, 내시들이 홍여강의 양 팔짱을 끼어 부축한채 쫓아냈다. 사관들의 저항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사관 민인생이 나섰다.(4월29일)
민인생은 “나는 들어오지 말라는 왕명을 들은 바 없다”면서 편전의 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편전이라 해도 대신들이 정사를 아뢰고, 경연이 열리는 곳인데 사관이 들어오지 않으면 누가 제대로 기록한단 말입니까.”(민인생)
민인생은 그러면서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으면, 사관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臣如不直 上有皇天)”라 했다.(<태종실록> 1401년 4월29일)

■사관이 모르게…
1401년 7월 8일, 편전에 앉아있던 태종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과연 누군가 문밖에서 엿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태종이 “어떤 자가 편전을 엿보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내관들이 달려나가 보니 사관 민인생이었다.
출입이 금지되자 몰래 훔쳐보며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려 한 것이다. 태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이제부터 사관은 매일같이 입궐하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태종과 사관’의 힘겨루기가 계속되었다. 1404년(태종4) 2월8일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그날 임금이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루사냥에 나섰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깜짝 놀라 훌훌 털고 일어난 태종이 한다는 말이 걸작이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
그런데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이날 사관은 태종 임금이 ‘이 일을 모르게 하라’는 ‘오프더레코드’까지 낱낱이 기록해서 결국 <태종실록>에 남겼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읽고 있는 것이고….

■붓·종이 없이 입시한 사관
실록을 읽다보면 사관이 직필을 하느라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많다.
보통 사관은 붓과 종이를 들고 입시하여 자리에 앉아 임금과 신하의 언행을 기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실록을 읽어보면 흥미롭다.
즉 세종 때 “사관은 붓과 종이를 들고 입시한다”(<세종실록> 1425년 11월3일)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듯 하다. 세종의 지시 후 60년이 지난 1485년(성종16) 윤4월11일조 <성종실록> 기사가 눈길을 끈다.
“사관이 임금과 신하가 정사를 펼치는 장면을 그 자리에서 써야 하는데, 붓과 종이도 없이 들어가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사람 얼굴도 볼 수 없으니 어찌 들은 바를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기가 막힌다. 요즘 같으면 자동 녹음하면 될 일이 아닌가. 그런데 조선 전기엔 순전히 머리에 담아놓은 내용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다가 풀어냈다는 얘기가 된다. 그 시대 사관은 모두 천재가 아니었나 싶다.
각설하고 성종은 “사관들이 논의한 바의 대강은 잃지 않기를 바란다”면서도 종이와 붓의 지참은 허락하지 않았다.
4년 뒤인 1489년(성종 20) 8월27일 사관인 검열(9품) 이주(1468~1504)가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
“저희(사관)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그러니 목소리만 듣고 용모를 보지 못하니 사람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습니다…옛 역사서를 보면 ‘발연히 얼굴빛이 변했다’ ‘용모가 태연자약하다’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목소리가 노기를 띠었다’는 등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이후 열띤 논쟁이 벌어졌고, 성종이 절충안을 마련했다. “그래? 그러면 9종이와 붓을 지니고) 앉아서 기록하도록 하여라.”
검토관 김전(1458~1523)은 “옛말에 사관을 ‘이필자(珥筆者·붓을 관의 옆에 꽂다)’라 했다”는 고사를 전했다. 사관이 종이를 들고 붓을 관 옆에 꽂고 입시했다고 강조한 것이다.

■피바람 낸 사초실명제
또 ‘사초실명제’ 도입으로 피바람을 일으킨 일도 있었다.
1469년 즉위한 예종은 <세조실록>을 편찬하면서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쓰라고 명했다. 사간원 헌납(정5품) 장계이는 “절대 안된다”고 직간했다.
“역사는 본디 직필 해야 합니다. 사초는 국가의 일만 기록한 게 아니라 사대부의 선악과 득실을 모두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초에 실명을 기록한다면 사람들의 원망을 얻을까 염려하게 됩니다, 이로써 직필을 할 수 없게 됩니다.”(<예종실록> 1469년년 4월11일)
하지만 논란 끝에 ‘사초실명제’가 도입됐다. 그런데 이 제도가 장계이의 걱정대로 피바람을 불렀다.

즉 사관 민수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사초를 쓰면서 대신들의 인물평을 적어놨다. 게중에는 특정 인물들을 혹평한 일이 많았다. 문제는 혹평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내로라는 대신들이 많았다는 점이었다.
예컨대 “윤사흔은 술에 취하고, 임원준은 의술로 관직을 얻었고, 양성지는 탐오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사초실명제 도입으로 당사자들이 인물평의 기자를 알게 된다면 대신들에게 원망을 살까 두려웠다. 민수는 동료 사관 강치성·원숙강 등과 함께 사초를 뽑아내 문제의 내용을 삭제·수정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주범인 민수는 제주 관노로 쫓겨났다. 임금(예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기에 극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수에게 사초를 건네준 강치성과 원숙강은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죄질에 비해 너무 심한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닌가. 하지만 중종 때 예문관 관리들이 올린 상소를 보라.(<중종실록> 1507년 6월10일)
“역사가 있은 뒤에 시비가 밝혀졌으며, 시비가 밝혀지자 공론(公論)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그러므로 한 글자의 포폄(褒貶·평가)이 부월(斧鉞·임금의 권위)보다도 엄하고, 만세의 경계됨이 별이나 햇빛보다도 밝았습니다. 사관의 직책이 너무도 중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얼굴로 짐승의 소리를…
예나 지금이나 태어나서는 안될 지도자가 출현하기 마련이다.
예컨대 진나라 시황제(기원전 247~210)가 이룩한 통일 진나라를 15년 만에 망쳐놓은 진2세 호해(기원전 210~207)는 아방궁 건축을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천하를 황제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무엇이 잘못이냐”고 소리쳤다.
역사가 사마천은 이를 두고 “인두축명(人頭畜鳴·사람의 얼굴로 짐승의 소리를 내뱉는다”(<사기> ‘진시황본기’)고 혀를 찼다. 하필이면 연산군이 이 진2세 호해를 롤모델로 삼기도 했다.
역사에서 흔히 인용되는 사서가 <춘추>이다. 공자는 “등장 인물들을 포폄(선악을 평가)하여 군주될 사람들이 참고해서 실행하도록 하기 위해 <춘추>를 편찬했다”(<사기> ‘공자세가’)고 했다.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쓰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등문공·하’)고 했다.
옛 사람들은 “난신적자는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한다”면서 “난신적자는 비록 구족(九族)을 다 죽인다 해도 시원치 않다”(<성종실록> 1471년 6월8일)고 했다. 심지어 “몸이 살았거나 죽었거나 과거냐 현재냐의 구별이 없다. 썩은 해골도 주벌할 수 있다”(<광해군일기> 1609년 5월8일)고도 했다.
역사의 심판은 공소시효가 없다는 뜻이다. 얼마나 살벌한 말인가.
‘사초를 쓰는 심정’으로 수사에 임하겠다는 조은석 특검 등 3대 특검이 끝까지 떠올려야 할 글귀이다. 사마천의 한탄처럼 사람의 얼굴을 하고 짐승의 소리를 내뱉는 ‘인두축명’을 가만 두면 되겠는가.
“사관이 제대로 쓰지 못하면 사형”이라는 정조 임금의 경고도 깊이 새겨야 할 듯 싶다. (이 기사를 위해 오항녕 전주대 교수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오항녕, <실록이란 무엇인가>, 역사비평사, 2018
김경수, <조선시대의 사관 연구>, 국학자료원, 1998
방혜주, ‘조선시대 사관 연구’, 강원대 석사논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