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가 쏘아 올린 ‘한식적 터치’ …셰프의 정체성과 만나다 [더 하이엔드]

2024-10-22

요리경연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의 인기로 방송에 출연한 셰프들의 식당은 물론 메뉴까지 연일 화제가 되면서 요식업과 파인다이닝 씬에 오랜만에 훈풍이 불고 있다. 블룸버그·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 외신 역시 넷플릭스 글로벌에서 3주 연속 1위를 기록한 프로그램의 신드롬을 보도하며, 한국 요리의 관심과 위상을 언급했다.

만드는 이의 정체성에서 발현한 한식이라는 뿌리

프로그램에서는 ‘아시아적 터치’ 혹은 ‘한식적 터치’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 어릴 적 할머니가 해주던 음식의 추억을 끌어내 게국지 파스타를 만드는가 하면(권성준 셰프), 미국에서 자라며 문화적 혼재를 겪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비빔밥으로 재탄생시키는(에드워드 리 셰프) 명장면들이 속속 등장했다. 단순히 음식 문화의 장르를 섞는 ‘퓨전’과는 한끗 다른 태도다. 다이닝미디어아시아 이정윤 대표는 “파인다이닝은 셰프가 자신의 정체성을 요리로 표현하는 예술에 가깝다”라며 “예술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발현하는 것처럼 셰프들 역시 한국인으로서 정체성과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통해 식재료를 찾고 조리법에 관심을 두다 보니 한국적인 터치가 들어가는 부분이 비율적으로 많아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식 파인다이닝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지금, 때마침 서울에 문 연 공간이 눈에 띈다. 셰프의 철학을 담아 한식에 접근하는, 진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곳들이다.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깊고 고요한 공간, 묵정서울

‘먹처럼 검게 보일 정도로 깊은 우물’. 서울 묵정(墨井)동은 그 이름이 낯설지 않게 한때 충무로 일대에서 수많은 인쇄소가 성업했던 동네다.

한적한 골목길 사이 기하학적인 모양의 콘크리트 건물이 불쑥 등장하는데, 공간 스튜디오 쇼메이커스의 사옥이자 ‘묵정서울’의 공간이다. 묵정의 뜻을 살려 까맣게 그을린 나무 기둥이 인상적인 홀에는 셰프가 정성스럽게 관리하는 콤부차·매실 등 발효통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이곳은 오스틴강이 오너 셰프로 11월 개점을 앞두고 있다. 미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에서 요리와 방송 활동을 겸한 지 10년 차. 그는 어떻게 발효 음식점을 열게 된 걸까.

“한국에서 살게 되면서 늘 한식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어요. 코로나로 식당 문을 닫게 되었을 때 기회다 싶었죠. 뉴욕에서 ‘메주’를 운영하는 김훈이 셰프가 제주도에서 ‘팜투 테이블’로 식재료를 연구하는 멘토를 소개해 주셨어요.”

음식으로 건강을 회복한 경험을 바탕으로 치유 요리를 연구하고 전파해온 한라산생약연구소·인성물산 백운 고문 가족을 만난 강 셰프는 한 해 동안 농사 짓기부터 한식의 기초를 배우고 익혔다. 어떤 소금을 쓰는지, 어떻게 발효를 하는지 연구는 물론 한식의 철학을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강 셰프의 제안으로 팝업 레스토랑인 ‘오지나'를 운영하기도 했다. 오스틴 강 셰프와 백운 고문의 딸인 황지원 셰프, 황나비 디렉터의 이름을 딴 것. 그렇게 4년여간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한식에 대한 애정을 키워 나갔고, 묵정서울의 재료 중 일부 역시 오지나에서 공수해 온다.

“일단 몸이 편해지고 그러다 보니 행복했어요. 장은 우리 몸의 ‘두 번째 뇌’라고 하잖아요. 한식의 주 베이스가 발효 음식이다보니 소화도 잘되고 다음 날 붓지도 않았죠.”

수구 선수 출신으로 평소 식단과 컨디션을 신경 써온 그는 몸이 보내는 신호를 바로 감지할 수 있었다. 결정적 계기는 또 있다. 친구의 부탁으로 항암 치료 중이던 그의 아버지 식단을 관리하게 된 것. 책임감에 몇 번을 고사했지만 결국 몇 개월 직접 식사를 차렸다. 지금은 완치해 건강을 찾은 그의 모습을 보면서 섭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묵정서울은 지금까지 그가 쌓은 한식 경험과 미국에서 자란 정체성이 어우러지는 곳이다.

“주요 메뉴인 바베큐는 시간으로 만드는 요리예요. 오겹살에 7년 묵은 홍삼 된장을 이틀 동안 재우고, 6시간 동안 천천히 훈연해요. 한식을 기본으로 하되 미국의 정서를 반영하는 편이죠.” 치유 밥상의 중요함을 깨달은 그는 이제 자신만의 정체성을 담은 요리를 내놓게 됐다.

묵정서울이 지향하는 바는 웰니스를 기본으로 하는 ‘소통 공간’. 요리가 주인공이 아닌 대화하는 사람과 시간이 소중한 공간을 만든다는 생각이다. 메뉴는 모두 단품이며 두부 후무스, 뿔소라 에스카르고, 로스트 치킨과 찹쌀밥, 홍삼 된장 오겹 바베큐, 고추장 립 바베큐 등이 있다.

코리안 스패니시를 선보이는 사라우츠

지난 5월 문 연 ‘사라우츠’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요리와 한식의 해석을 입힌 ‘코리안 스패니시’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이다. 최경훈 셰프는 앞서 스페인 레스토랑 보라초·모스꼬라를 성공적으로 일군 경력이 있다. 그는 스페인의 전설적인 셰프인 까를로스 아르기냐노가 설립한 바스크 공립 요리학교에서 수학하고,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인 수베로아를 거치며 바스크 지방 식문화에 대한 식견이 풍부하다. 사라우츠는 그가 유학한 바스크 지방의 이름으로, 산과 바다를 품고 있어 천혜의 식재료가 풍부한 곳이다. 자연스럽게 기교를 부리기보다 식재료 본연의 특색을 살리는 조리법이 발달했다.

모스꼬라의 휴식기 동안 최 셰프는 스페인과 일본을 방문하면서 한국에 없는 ‘코리안 스패니시 퀴진’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싹텄다. “나의 정체성이 담긴 요리를 하려면 출신과 뿌리에 대해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식은 오래된 역사와 기술이 담긴 식문화인데, (스페인 요리를 하더라도)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담지 않는다면 본질을 잊는 게 아닐까요.” 사라우츠에서는 스페인 재료를 한식 조리법으로, 우리 땅에서 나는 식재료를 스페인 요리 기법을 접목시키는 등 상호 간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요리를 구상한다.

스페인의 대표 메뉴로 손꼽히는 타파스를 바스크 지방에서는 ‘핀초’라고 부르는데, ‘힐다’는 수많은 핀초의 기원이 된 음식이다. 최 셰프는 올리브, 고추, 앤초비 절임의 삼합이 필수인 힐다를 가을에 한창 기름이 오르는 전어와 깨끗한 맛을 내는 산초잎 등 한식적 터치로 조합해 신선한 해석을 끌어냈다. “예전에 전라남도 일대를 여행하다 매생이 굴국밥에 매료된 적이 있어요. 맛을 기억했다가 그라탕으로 만든 적이 있는데 한국 사람과 스페인 사람 입맛에 모두 ‘아는 맛’이지만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게 재밌는 지점이더라고요.”

해산물 살피콘은 스페인에서 차갑게 먹는 샐러드의 종류인데, 매주 농장에서 올라오는 유기농 허브를 올려 낸다. 시기에 따라 나는 꽃과 작물이 달라 최 셰프가 ‘계절에 몸을 맡긴 메뉴’라고 부른다. 꽃은 장식이라는 편견과 다르게 각기 다른 맛과 향을 조합한 메뉴다. 이밖에 완두콩 속 레드와인에 조려 만든 이베리코 항정살, 스페인 여름 수프인 아호 블랑코와 한식의 새우 잣찜 냉채를 오마주한 랍스터 아호 블랑코 등 독창적이면서도 먹는 사람을 고려한 메뉴를 낸다.

최 셰프는 일본에서 ‘재패니즈 스패니시’ 장르가 정교하게 발달한 것을 경험했다. 요리 또한 ‘식문화' 이듯 먹는 사람의 정서와 지역 문화를 얼마나 이해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한 분야를 좋아하고 오래 공부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강요할 수는 없더라고요. 가장 중요한 건 클래식이지만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유리천장이 생겨나거든요. 사라우츠는 클래식을 기반 삼아 독창적인 요리를 실험하는 공간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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