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그리고 노벨문학상

2024-10-13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아울러 묻게 된다. 노벨문학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노벨상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수여된다. 쉴리 프뤼돔이 첫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레프 톨스토이가 생존해있었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에는 우리에게 낯선 작가가 적잖은 반면에 톨스토이처럼 수상하지 못한 저명한 작가도 많다. 우리는 여전히 톨스토이를 얘기하지만 프뤼돔의 시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을 적어도 내 주변에선 보지 못했다. 밝혀둘 것은 프뤼돔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상은 논란이 따른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장 폴 사르트르는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다. 파스테르나크는 정치적 압력에 의해 포기한 것이었지만 사르트르는 노벨상 수상으로 얻게 되는 권위가 작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사르트르의 그 후 행적에 대한 논의와는 별개로 적어도 그가 노벨상의 권위에 대한 대중의 맹목적 추종(?)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일견 타당하다.

노벨문학상은 지역적 감성을 보편적 세계인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선정과정에서 문학의 번역이 가져오는 불완전함을 해소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심사자들이 한국어로 한강의 작품을 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시의 감성도 모국어로 느낄 수 있는 것을 번역으로 대체할 수 없다. 시 만큼은 아니지만 소설도 번역이 주는 장벽이 엄연히 존재한다. 사회 문화적 배경의 전제, 대체할 수 없는 방언과 미묘한 뉘앙스를 번역으로 완벽하게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강 작품을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의 역할은 대단히 높게 평가할만하다.

이제 모처럼 대한민국이 하나 되어 기뻐하는 흔치않은 경사에 불편한 몇 마디를 하려한다.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소식에 서점이 난리라고 한다. 한강 작품을 읽기위해 경쟁적으로 나서는 대중을 삐딱하게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붐이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너무나 책을 읽지 않아서 문해력이 심각한 수준이 되어가는 이 시대에 읽을 수 있는 귀한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니 분명 기쁜 일이다. 도파민 분비 속 희열은 일회성으로 끝나게 된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나는 한강이 아버지 한승원과는 다른 깊이를 가진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강 스스로는 아버지 한승원의 영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독자인 내가 읽은 한승원과 한강 사이에는 그 어떤 높이의 차이가 없다.

어렴풋이 말할 수 있는 것은, 한승원 작품을 한림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한강 작품보다 더 난해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강이 위대한 작가 반열에 오른 것과는 별개로 우리에겐 소중한 작가들이 예전에도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한승원, 황석영 그리고 황순원 등 수많은 작가들.

노벨문학상과 읽는 것은 별개다. 나는 여전히 한승원 작품에 더 깊은 울림을 받는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다시 한 번 축하한다.

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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