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2월 6일 오후. 김민기 국회 사무총장에게 국회 경호기획관의 다급한 보고 전화가 걸려왔다. 국회가 12·3 비상계엄을 해제 의결한지 사흘째 되던 날. 정국 혼란은 극에 달해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의 ‘2차 계엄’ 실행 가능성을,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의 임기단축 개헌 발표 가능성을 거론했다. 대통령이 국회로 온다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대비해야 했다.
“그래? 정보 출처는 어디야?” 김 총장의 질문에 “국회경비대 부대장이 무선망으로 경찰 통신을 받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대통령의 이동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국회 정문에 차벽을 설치하고, 헬기 착륙 방지를 위해 잔디밭 위에도 버스를 세웠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이날 오후 3시 20분 “대통령의 국회 방문 계획이 있다면 이를 유보해달라. 경호 사전 협의 없이 안전 문제를 담보하기 어렵다”는 긴급 담화를 발표했다.
계엄 1년을 앞둔 지금까지 윤 대통령의 이날 행적은 베일에 싸여있다. 김 총장은 중앙일보와의 12ㆍ3 계엄 1년 특별 인터뷰를 통해 그간 외부에 밝힌 적 없는 계엄의 징후와 시간대별 국회 상황을 그 누구보다 상세히 풀어냈다. 국방위·정보위·행안위를 거친 3선 의원 출신의 그는 계엄 5개월여 전 국회 사무총장에 임명됐다. 1년간 깨알같이 복기했다는 한마디 한마디가 살아있는 계엄 비화(秘話)의 보고였다.

계엄 징후를 처음 감지한 건 언제인가.
2024년 2월, 기존 국방부 부대 훈령이 갑자기 바뀌었을 때다. 대통령 임기(5년) 대규모 행사는 한 번 허용는데, 이를 ‘필요에 의하면 언제든 할 수 있다’고 바꿔 이상하게 생각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2년 연속(2023ㆍ2024년) 연속 국군의 날 시가행진 행사를 열고, 연말 계엄도 가능하게 됐다. 정부의 예비비 증액 편성도 의심스러웠다. 코로나 19 이후 감액 편성 추세였는데, 2025년 예산에는 오히려 6000억원 증액했다. ‘계엄 예산’을 염두에 뒀을 걸로 본다.
취임 후 특이 동향은 없었나.
지난해 7~8월경 신원식 국방부 장관과 조태용 국정원장이 비서실을 통해 차례로 면담을 요청해 의아하게 생각했다. 신 장관은 의원 시절 국방위 활동으로 친분이 있지만, 특별히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면담을 미루는 와중에 (8월 12일) 신 장관이 국가안보실장이 되고, 김용현 대통령 경호처장이 국방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계엄 하루 전인 12월 2일 김 전 장관은 본회의 참석차 국회를 방문했다가 본청 1층 국방부 협력단 사무실에 1시간 동안 차를 마시며 머물렀다. 방첩사 직원과 함께였다.
201특공여단 소대장 출신인 김 총장은 의원 시절 군사·안보 분야에 전문성을 인정받아 주변 의원들에게 ‘밀덕’(밀리터리 덕후)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2017년 정보위에서 조현천 계엄 문건을 국정원으로부터 직접 보고받고, 계엄법 개정안 발의를 준비하는 등 수 년간 계엄 방지·대응책을 연구했다. 공교롭게도 ‘계엄 전문가’가 국회 사무를 총괄할 때 계엄이 터진 셈이다. 김 총장은 지난해 7월 특수전사령부가 국회 내부 설계도면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자 이를 단박에 거절하기도 했다. (본지 1월 13일자 보도.)

12·3 계엄 선포 순간을 회고한다면.
올 것이 왔다는 생각뿐이었다. 문제가 될까봐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지만, 우원식 의장과 7~11월 수 차례 계엄 관련 비공개 회의를 했다. 그래서 “계엄이 일어나겠어?”라며 웃어 넘기던 우 의장과 그날 밤 한번에 계엄을 해제할 수 있었다.
본회의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긴박했지만, 역사적 계엄 해제 과정에서 절차적 흠결을 남기지 않고자 노력했다. 4일 0시 56분에 계엄 해제 결의안의 의안 등록이 끝났지만, 향후 있을지 모를 ‘표결권 침해’ 논란을 피하기 위해 정확히 새벽 1시 이후 표결을 건의했다. 당시 우 의장에게 “제 바람은 (해제 찬성) 200석을 넘기는 것”이라고 했고, 의장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표결 직전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이 회의장에 와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대표였나.
그렇다. (※국회는 본회의 중 의원을 제외한 인사의 회의장 출입을 통제한다.) 하지만 그날은 상황이 달랐다. 내가 직원에게 “오죽 급하면 들어왔겠느냐”고 했다. 정당 대표가 아니라, 취재원이나 일반인이 들어왔다고 해도 그날은 막지 않았을 것이다. 국회는 민의의 전당이다.

12·3 계엄 해제 결의안은 국민의힘 의원 18명을 포함한 190명의 찬성으로 의결됐다. 다만 김 총장은 몇 시간 뒤 박찬대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가 “계엄의 부당성을 알리는 의사진행발언을 하겠다”며 6명의 자유발언 신청서를 제출했을 때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계엄군이 이제 막 철수를 시작했는데, 정치적 발언으로 자극하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계엄일을 왜 12월 3일로 정했을까.
원래는 4일 본회의가 없었다. 당초 예정됐던 본회의는 12월 2일과 10일이었다. 국회가 11월 26일 갑작스레 김건희 특검법의 재의를 요구했고, 그 와중에 (당시 중앙지검장 등) 검사 탄핵안이 발의돼 여야가 중간에 4일 본회의를 추가하기로 11월 29일에 합의를 했다. 계엄일은 그(11월 29일) 이전에 확정하고 준비했다고 본다. (군사 보안을 생각하면) 갑자기 본회의가 생겼다고 해서 미리 준비한 계엄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게 불가능하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 담화문에 아직 삭감되지 않은 예산을 ‘삭감됐다’고 표현한 게 하나의 근거다. 미리 써 놓은 담화문에 12월 2일에서 10일로 예산 확정이 미뤄진 상황을 미처 반영하지 못했다.
2017년 조현천 계엄문건은 어떤 의미가 있나.
12·3 계엄 세력이 분명히 참고했다고 본다. 윤 전 대통령은 (1월 14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2차 답변서’에서) 계엄 해제가 “적어도 며칠 걸릴 줄 알았다”고 했다. 조현천 문건에 ‘사람을 통제하고 직권상정을 막는다’는 계획이 적혀있는데, 국회가 상임위에 안건을 직권으로 상정하고 법사위→본회의까지 의결하는 수 일 간의 절차 봉쇄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걸 미리 알았던 우리는 12·3 계엄 해제 의결안을 상임위·법사위 절차 없이 곧바로 본회의에 ‘직접상정’했다. 윤 전 대통령이 예상하지 못했을 절차다.

인터뷰는 지난달 25일 국회에서 3시간 10분에 걸쳐 이뤄졌다. 2006년 정치 입문 후 작심하고 인터뷰한 게 처음이라는 김 총장은 끝날 무렵 “그 이야기도 해야 하는데…”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2차 계엄 징후가 있던 12월 6일의 진실은 꼭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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