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따자마자 은퇴?…손기정은 마라톤 멈추지 않았다

2025-10-24

허진석의 스포츠 라운지

탁월한 산문가이기도 한 시인 윤제림은 대학 선배 조지훈의 평전인 『늬들 마음 우리가 안다』를 쓰면서 사진 한 장으로 문을 연다. 손기정과 최승희. 조지훈의 ‘승무(僧舞)’를 말하려면 최승희가 필요했으리라. 최승희와 ‘급’을 맞추려면 손기정 정도는 돼야 한다.

“조선반도에 제11회 베를린올림픽 쾌거의 열기가 여전히 뜨겁던 10월 어느 날, 세계를 놀라게 한 조선의 영웅을 위해, 몽양 여운형과 고하 송진우 등 민족지도자들이 축하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 사진은 바로 그날의 것입니다.”

두 사람은 식민지 조선의 몇 안 되는 월드 클래스 스타였다. 동양 무대를 정복한 최승희는 유럽 공연을 앞뒀다. 손기정은 올림픽 챔피언. 두 사람은 조선은 사라졌으되 조선인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한다. 손기정은 사인할 때 ‘손긔졍 KOREAN’이라고 썼다. 최승희는 서양에서 공연할 때 자신을 ‘Danseuse Coreenne’라고 소개했다(정병호, 『춤추는 최승희』 151쪽).

최승희와 식민지 조선 양대 월드스타

윤제림이 보기에 사진 속엔 네 사람이 있다. 최승희 옆에 사이쇼키, 손기정 옆에 손기테이. 시인은 손기정의 얼굴에 ‘절반이 그늘’이라고 썼다. 21세기에 보는 1936년의 조선 청년, 90년 동안 변함없는 시대의 상징이다. 하지만 다른 모습은 없을까? 필자는 미래를, 구체적으로는 올림픽 2연패를 꿈꾼 월드 클래스 마라토너를 보고자 한다.

올림픽 남자마라톤에서 두 대회 연속 우승한 선수는 세 명이다.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비킬라는 1960년 로마·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우승했다. 발데마르 치르핀스키(독일)가 1976년 몬트리올·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서 우승할 때는 동독 선수였다. 케냐의 엘리우드 킵초게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2020년 도쿄올림픽(2021년 개최)에서 우승했다.

네 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첫 번째일 수도 있었을) 네 번째 사나이는 운명의 버림을 받았다. 손기정.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에서 대회신기록(2시간 29분 19초 2)을 세우며 우승했다. 한 해 전에는 메이지신궁대회에서 세계최고기록(2시간 26분 42초)을 세우기도 했다. 이 기록은 공인받지 못했지만 세계는 샛별처럼 떠오른 조선 청년을 주목했다.

베를린 승전보에 조선과 일본이 모두 열광했다. 경성과 도쿄의 언론은 호외를 찍었다. 그러나 승리를 대하는 방식은 달랐다. 조선에서는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일본에서는 올림픽 제패의 염원을 조선 출신의 마라토너가 이루었다는 사실을 내선융화(內鮮融和)의 결과로 해석했다.

‘일장기 삭제’는 조선과 일본의 시각차를 보여준다. 총독부는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를 처벌했다. 이 사건은 손기정이 조선의 민족 감정에 불을 붙일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닌 존재임을 확인시켰다. 손기정이 개선했을 때는 사건의 여진이 남았을 때다.

귀국 이후 손기정의 삶은 양정고보 졸업과 메이지대 유학, 조선저축은행 입사로 이어진다. 일본의 압력으로 육상을 중단했고, 선수 생활도 끝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당대의 미디어 자료는 손기정이 1940년 도쿄올림픽을 목표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특히 조선의 언론은 손기정이 대학에서 올림픽을 목표로 체계적인 훈련을 했다고 썼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는 손기정이 전 대회 우승자로서 예선을 거치지 않고 올림픽에 나갈 것이며 역사적 기록을 남기기 위해 ‘규율 있는 훈련’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손기정이 마라톤 코스를 시주(試走)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국제육상연맹이 공인한 올림픽 코스를 전 대회 우승자가 시주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무엇보다도 손기정의 의지가 강했다. 1937년 1월 25일. 손기정은 아사히신문이 수여하는 아사히체육상을 수상했다. 그는 수상 연설에서 “4년 후 도쿄올림픽에서도 반드시 활약해 보이겠다”고 선언한다. 월간 ‘조광’의 1938년 5월호에는 “마음에 별 변화가 없는 한 (도쿄올림픽에) 출장하겠다”는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1940년에 올림픽이 열렸다면? 일본은 손기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홈 코스에서 거두는 마라톤 우승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손기정이 도쿄올림픽 마라톤 코스를 달렸다면 결과가 어땠을지 단언하기 어렵다. 손기정은 자서전인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에 짧고 강하게 적었다. 자신감이 보인다.

“(검사를 맡은) 최성장씨는 ‘검사 결과 그는 얼마든지 더 오래 달릴 수 있는 특수한 심폐 기능을 가졌음이 확인되었다. 아마 1940년에는 베를린에서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일상생활에서 의식주에 주의를 기울이면 동경에서의 우승도 문제없을 것이다’라고 검사 결과를 평가했다.”

운명은 사마귀의 앞발과 같다. 맨 앞의 생각부터 베어버린다. 도쿄는 1937년 7월 31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으나 전쟁으로 치닫는 국제 정세 속에서 1938년 7월 15일 개최권을 반납했다. 올림픽은 끝내 열리지 못했다. 이는 손기정에게 육상을 계속해야 할 이유와 목표의 소멸을 뜻했다.

조선의 종합 대중잡지 ‘삼천리’의 1939년 1월호에 실린 대담 기사에 손기정이 화제에 오른다. 제목은 ‘장안 재자가인(才子佳人), 영화와 흥망기’다. 진행자인 박팔연이 “다시 올림픽에 손기정이 제패하는 날 있을까”하고 묻자 이서구가 “명년(내년) 동경서 있었더면, 몰랐지”하고 아쉬워한다.

그래도 손기정은 달린다. 달려야 했다. 데라시마 젠이치는 『손기정 평전』에서 일본 정부가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을 것,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얼굴을 내밀지 말 것, 가능한 한 조용히 지낼 것’을 요구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손기정은 일본의 열광하는 대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달렸다.

1938년 11월 개최된 ‘국민정신작흥체육대회’에서 손기정의 이미지는 선명하다. 일본육상연맹은 신사와 신궁들 사이 520㎞ 거리를 주자들이 전승(戰勝)을 기원하는 ‘성모(聖矛)’를 들고 달리게 했다. 손기정이 11월 6일 도쿄시 외원(外苑) 입구에서 아오야마소학교의 학생으로부터 성모를 전달받는 사진이 아사히신문에 남아 있다.

손기정은 계속해서 일본의 대관중 앞에 영웅으로서 모습을 나타낸다. 1940년 메이지신궁 체육대회가 열렸을 때는 국학대학원에서 연설하고 성화를 봉송했다. 손기정은 이때의 경험을 월간잡지 ‘삼천리’에 기고했다. ‘체육대제전참관과 조선체육진흥에의 전망’의 제5장, 성화단에 참렬(參列)이다.

일본, 손기정을 내선융화 성취로 해석

선명한 존재감은 오욕을 강요한다. 일본은 전황이 악화되자 식민지에서 학도병을 징집한다. 손기정은 메이지대 졸업생 신분으로 ‘학도선배중견단(學徒先輩中堅團)’의 일원이 되어 조선인 학도병 모집을 독려했다. 손기정에게 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손기정은 이 일이 평생의 부끄러움이었다고 고백했다.

필자는 최근 ‘한국체육사학회지’에 이상의 내용을 다룬 논문을 발표했다. 제목은 ‘미디어로 재구성한 일제 말기 손기정의 생애’이다. 손기정은 한 번도 월드 스타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다. 평생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달린 불행한 젊은이’로 살다가 죽었다. 그 세월이 90년이다. 그러나 그는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이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의 마라톤 선수였다.

시인 윤제림처럼, 손기정과 최승희에 주목한 일본 작가가 있다. 다지마 오사무. 혐한으로 명성을 누리는 자다. 그가 일본 매체 ‘노트닷컴’의 2024년 5월 10일자에 해묵은 잡지기사를 소개한다.

『부인공론(婦人公論)』 1936년 10월호에 실린 인터뷰다. 게스트는 최승희, 진행자는 와다 쿠니보다. 와다는 손기정을 최승희의 ‘절친’으로 소개한다.

“그녀는 손기정의 우승 소식에 쥐고 있던 달걀을 깨뜨릴 만큼 흥분했다고 한다.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일본인이 이기는 것보다 몇 배 더 기쁩니다.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이 전(全) 일본을 위해 일했다니….’”

다지마는 최승희가 ‘조선인’이 아니라 ‘조선에서 태어난 사람’, ‘일본제국’이 아니라 ‘전 일본’이라고 한 데 주목한다. 계산된 발언이라는 것이다. 손기정은 스스로 “다리도 빠르지만 혀도 빠르다”는 달변가였다. 다지마는 “손기정은 총독부의 신경에 거슬리는 말을 많이 했다. 그것이 독설인지 동포를 위한 ‘립 서비스’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물론 계산된 유보다.

허진석 한국체육대 교수. 스포츠 기자로 30여 년간 경기장 안팎을 누볐으며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지냈다. 2023년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하고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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