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역사 바느질로 새겼다···설치 예술가의 어떤 '선언'

2025-05-12

전시장 한가운데 8개의 태피스트리가 띠처럼 둥글게 원을 그리며 걸려 있다. 각 태피스트리에 수놓아진 것은 꽃이나 풍경 그림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기생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현계옥과 정칠성, 고무 공장 노동자로 임금 삭감에 맞서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1인 시위를 벌였던 강주룡 등의 모습이 그림책 삽화처럼 담겼다. 호미 들고 독립운동에 나선 제주 해녀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도 있고,1960~70년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노동 현장에서 일했던 소녀들 모습도 보인다. 미술가 홍영인(53)씨가 주목한 우리 역사 속 여성들이다.

영국 브리스톨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홍영인의 첫 국내 미술관 개인전 '다섯 극과 모놀로그'(7월 20일까지)가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9일 개막했다. 길이 40m에 달하는 대형 태피스트리 '다섯극'을 비롯해 동물 장난감 형상의 조각들과 사운드 설치 작품 '우연한 낙원'을 하나의 '공연'처럼 선보이는 독특한 전시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원작가로 주목받은 홍씨는 동물을 소재로 한 작업으로 인간과 동물의 위계에 대해 질문하는 한편 바느질을 활용한 텍스타일 작업으로 우리 역사 속 여성 노동자들의 존재를 환기하며 '역사 새로 쓰기'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는 앞서 해온 작업의 맥락을 이으면서도 한층 더 감각적이고 실험적으로 보인다. 태피스트리와 오브제, 사운드와 어울려 퍼포머들의 퍼포먼스가 이뤄질 때 작품이 비로소 하나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8일 전시장에서 만난 홍씨는 "이번에는 전시장을 하나의 빈 무대라고 생각하고 작업했다"면서 "그동안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내 이야기를 한데 모은 하나의 선언(스테이트먼트)"이라고 말했다.

삼베에 자수로 수놓아진 그림은 작가가 직접 제작했다. "2000년대 중반에 동대문에서 재봉틀 바느질을 배웠다"는 그는 "그곳에 몸담고 일해오신 분과 친해지면서 그동안 내가 몰랐던 역사를 알게 됐다. 특히 섬유·방직 산업 분야에서 일하며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했지만, 역사에서 기억되지 않는 분들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60~80년대에 한국 여성 노동사에 관해 특히 관심이 있었다"는 그는 "이번엔 1919년까지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갔다. 2022년부터 수집해온 이야기를 그림으로 수놓았다"고 덧붙였다.

삽화를 통해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은 작가가 12세기 잉글랜드의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로부터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했다. 또 태피스트리 안쪽엔 울주 대곡리와 천전리 반구대 암각화에서 착안해 추상화한 동물 형상과 기하학적 문양을 수놓거나 다른 소재를 붙이는 아플리케 기법으로 표현했다.

전시장 곳곳에는 작가가 동물원에서 본 동물들 놀이 도구에서 출발한 9점의 수공예 조각이 놓였다. 사람들이 머리에 짐을 받칠 때 쓰는 '똬리', 제주 전통 굿에서 사용된 무구 '기메' 등을 조형적으로 재해석해 짚으로 엮은 작품들이 눈에 띈다. 각 조각 작품은 퍼포먼스가 열릴 때 소품이 된다. 태피스트리는 제의, 즉 퍼포먼스를 위한 매뉴얼, 조각은 제의에 쓰이는 신성한 사물인 셈이다.

홍씨는 "태피스트리가 단지 과거를 기록하는 장치가 아니라, 지워진 역사와 잊힌 존재를 다시 불러내는 제의적 공간이 되길 바랐다"며 "한 명의 드러머와 네 명의 퍼포머들이 소품을 이용해 소리를 내고 몸을 움직일 때 제례가 완성되는 것으로 구상했다"고 전했다. 이 작품은 지난해 영국 브리스톨 스파이크 아일랜드에서 열린 전시에서 퍼포먼스와 함께 먼저 소개됐다. 이번 전시 중엔 오는 24일, 6월 14·28일, 7월 12일 오후 2시에 퍼포먼스가 열린다.

한편 사운드 설치 작품 '우연한 낙원'은 작가가 비무장지대에서 처음 두루미를 마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작가가 직접 작성하고 텍스트를 낭독한 소리는 협업자 오웬 로이드의 작업을 거쳐 두루미의 울음소리로 변환됐다. 2022년 PKM 전시에서 코끼리 짚신을 선보인 것처럼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존재들 목소리에 주목하며 지속해온 작업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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