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과 만난 현대미술
조선시대 민화 중에 이런 것도 있었나? ‘민화와 K팝아트 특별전’이라는 부제가 붙은 안산시 경기도미술관의 전시 ‘알고 보면 반할 세계’를 보면 독특한 그림들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예를 들어 서울 가회민화박물관 소장품인 ‘삼목구’ 그림을 보자. 날카로운 눈이 세 개 달린 털북숭이 개의 모습이 기괴하다. 하지만 목에는 앙증맞게 방울이 달려 있어서 웃음이 나온다.
삼목구는 저승의 삼목대왕이 이승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취한 모습이라 한다. 삼목구를 그저 가엾은 유기견이라 생각하고 거두어 잘 보살펴준 사람이 있었는데 훗날 죽어 저승에 갔을 때 삼목대왕을 만나 지난날의 보답으로 수명 연장을 받고 이승에 돌아와 팔만대장경을 조성했다는 전설이 있다. 삼목구 그림은 악귀를 쫓아낸다고 해서 일종의 부적으로 그려졌다.
전시장의 다른 코너에는 현대미술가 김지평의 화려한 족자 그림 ‘두려움 없이’가 걸려 있다. 삼목구와 그것을 탄 여성의 하반신을 그린 것이다. 여성의 옷과 팔다리 문신에 우주적 문양이 가득한 것을 보아 일종의 여신인 듯하다. 민화 ‘삼목구’가 악귀를 쫓는 부적이었다면 김 작가의 그림은 초월에 대한 동경을 담은 판타지적 그림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김 작가는 민화에 담긴 “주류 미술사에서 벗어나 있는 전통 도상과 개념”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한다.
전시는 이런 식으로 작자 미상의 전통 민화 27점과 민화와 관련된 현대미술가 19인의 작품 102점으로 구성된다. 한 코너에는 경기대학교 소성박물관 소장품인 조선 민화 ‘호피장막문방구도’ 8폭 병풍이 전시되어 있다. 호랑이 털가죽 장막이 걷어 올려진 너머로 책·지필묵·벼루·도자기·장식품·꽃·과일이 호화롭게 쌓여있는 그림으로서 책거리 그림의 일종이다. 호피 장막부터 그 너머 보이는 것들까지 당시 양반과 중인이 욕망하던 ‘명품’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민화 ‘약리도’ 현대미술 ‘등용문’ 눈길
그 옆에는 책거리 그림에 영향을 준 중국의 다보각경도(각종 귀한 기물을 진열한 장식장을 그린 그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젊은 미술가 오제성(37)의 설치 작품이 있다. 그의 ‘다보각경도’에는 한국 산야에 흩어진 옛 조각들을 세라믹으로 재창조한 조각들이 진열되어 있다. 오 작가의 ‘금강산전도’도 있는데 겸재 정선의 동명의 걸작을 알록달록한 세라믹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다른 한 쪽에는 박그림(37)의 ‘이간’과 ‘감로’가 걸려 있다. 정식으로 불화를 공부한 그는 고려불화의 기법을 구사해 정교하고 우아하게 퀴어 미학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감로’에는 관세음보살의 상징인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이 나오는데, 정병이 박카스 병이라 웃음을 자아낸다. 현대인에게는 에너지 음료가 감로수일지도 모른다.
경기도미술관은 이 ‘민화와 K팝아트 특별전’이 “전통 민화로부터 한국적 팝아트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기획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참여 현대미술가들 대부분이 흔히 ‘팝아트’로 분류되는 작가들이 아니다. 한국에서 ‘팝아트’라고 하면, 작가가 창조한 만화적 캐릭터가 등장하거나 대중문화 아이콘과 상표를 모티프로 사용한 알록달록한 작품으로 여겨지는데, 전시장에는 이런 작품들이 거의 없다. 심지어 김재민이 작가처럼 개념미술가로 분류될 만한 작가들도 있다. 덕분에 전시가 틀에 박히지 않고 흥미로우면서도 깊이가 있다는 평을 얻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전승보 관장은 “이 전시가 한국의 팝아트, K팝아트가 무엇인지를 원천적으로 고민하는 첫 출발이 되었으면 한다”고 하며 한국적 팝아트의 원류는 민화에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전시를 기획한 방초아 학예연구사는 “사실 참여 작가들을 섭외할 때도 ‘내가 팝아트 작가냐’라고 반문하는 작가들이 많았다”며 “팝아트를 서구 미술사를 통해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롭게 정의해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민화적인 태도와 팝적인 태도의 교집합을 갖는 작가들을 선별했다”면서 “그 교집합은 당대 대중적 현실의 반영, 해학과 위트, 현세에서의 욕망 및 내세에 대한 기원 표현”이라는 의견을 나타냈다.
전시는 이를 반영해 1부 ‘꿈의 땅’에서는 세속적 이상향을 다룬다. 여기에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조선 민화 ‘약리도’가 있는데, 잉어 한 마리가 계곡에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향해 힘차게 뛰어오르는 그림이다. 황하 상류에 있는 협곡의 거센 물살을 뛰어넘은 잉어는 용이 되어 승천하게 되며 그래서 이곳은 ‘등용문’으로 불린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한 그림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고시를 통해 ‘용’이 되기를 기원하는 이들이 걸어놓는 그림이다.
섭외 땐 “내가 팝아트 작가냐” 반문도
다른 쪽에는 현대미술가 이인선(52)의 ‘등용문’이 있는데 푸른 물빛 노방천에 뛰어오르는 물고기가 기계 자수로 놓여 있다. 그런데 물고기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뼈만 남아 화석처럼 보인다. 계속 도전만 하다가 그대로 화석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 작가는 자수를 이용한 작업을 오래 해왔는데, 그의 노트에 따르면 주한미군 상대로 모자와 재킷 등에 자수를 놓아주는 가게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전시의 2부 ‘세상살이’에서는 현실을 유머와 위트로 비트는 민화와 현대미술이 전시된다. 그중 경기대학교 소성박물관 소장품인 ‘호질도’가 눈에 띈다. 제목은 연암 박지원의 풍자와 위트 넘치는 한문 단편소설 ‘호질(虎叱·호랑이의 꾸짖음)’과 같은데, 그림 형식은 전통 민화 장르인 ‘작호도(鵲虎圖·까치 호랑이 그림)’를 따르고 있다.
소설 ‘호질’은 호랑이가 선비와 양반의 위선을 폭로하고 조롱하는 내용이다. 반대로 ‘작호도’는 민초를 상징하는 까치들이 양반을 상징하는 호랑이를 희롱하는 내용이다. 이 그림의 호랑이는 조롱하는 쪽인가, 조롱 당하는 쪽인가? 호랑이는 선비의 갓과 담뱃대를 지니고 있으니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호랑이는 적반하장으로 ‘호질’을 일갈하고 있는 것일까? 보면 볼수록 흥미로운 그림이다.
전시 3부 ‘뒷경치’에서는 토속신앙·유교·불교·도교를 망라하는 종교적 도상의 민화들과 그와 관련된 현대미술 작품이 전시된다. 그 중에 경기대학교 소성박물관이 소장한 ‘심우도’가 있다. ‘심우도’는 수행자가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과정에 비유해 묘사한 그림이다. 대개 사찰 법당 뒷벽에 벽화로 그려져 있는데, 이렇게 병풍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그 옆에는 현대미술가 임영주(42)가 ‘심우도’를 현대적 상황과 결합해 동자 대신 중년 여성을 등장시킨 회화 연작이 있다. 임 작가는 현대인 대부분이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내심으로 믿거나 반신반의하는 토속 신앙과 무속이 현대인의 삶에 스며있는 현상을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그와 관련된 사진·영상 등 다른 매체의 작품들도 전시된다.
전시에는 이 외에도 이수경(61)·손동현(44)·백정기(43) 등 유명한 작가들부터 떠오르는 젊은 작가들까지 다양한 작가들을 다룬다. 내년 2월 23일까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