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한강을 입다…6년 만에 서울서 두번째 남성복 패션쇼

2025-04-03

지난 3일 오후 7시, 서늘한 강바람과 함께 해 질 녘 어둠이 깔리자, 서울 잠실 한강공원에 설치된 회색 건물에 불이 켜졌다. 통창으로 도시의 불빛과 강이 보이는 가설 공간에선 음악과 함께 모델들이 일렁이는 강 물결처럼 유기적으로 등장했다. 48명의 모델은 런웨이 중심에 설치된 지그재그형 나무 데크를 따라 여유로운 발걸음을 이어갔다.

행사는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에르메스가 ‘2025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지난 2015년 고려대 화정체육관과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이어 세 번째, 남성복 쇼로는 두 번째 한국 무대로 서울의 상징인 한강을 택했다.

에르메스는 한 해 10여 차례 패션쇼를 여는 여타 브랜드와 달리 쇼를 제한적으로 선보인다. 다만 남성복 컬렉션의 경우, 매년 프랑스 파리에서 발표한 뒤 전 세계 단 한 곳을 정해 리피트 쇼(Repeat Show)를 연다. ‘리피트’지만 재현이 아닌 도시의 특성을 최대한 반영해 재구성하는 것이 특징. 도시마다 유치 경쟁이 치열한 행사 중 하나로 꼽히는 가운데, 이번 서울 낙점으로 한국 시장의 중요성과 한류의 영향력을 또 한 번 확인받았다는 분석이다.

물과 ‘도시 서울’의 연결점

그런데 서울에서도 왜 한강공원이었을까. 패션쇼장은 브랜드의 철학과 쇼의 메시지를 대변하는 요소다. 컬렉션과의 연결점이 있어야 하는 동시에, 그 브랜드가 가진 철학과 정체성과도 잘 부합해야 한다.

이번 패션쇼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이번 컬렉션은 '에르메스 보드워크(Hermès Boardwalk)'란 컨셉으로 ‘바다와 도시를 아우르는 남성’을 테마로 잡았다. 보드워크란 해변이나 해안가를 따라 있는 나무 산책로를 뜻한다. 에르메스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베로니크 니샤니앙은 이에 대해 “자연과 도심을 오가는 남성의 스타일을 자유로움과 우아함이 공존하는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보드워크, 즉 산책로를 자연과 도심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장치로 사용한 것. 보드워크를 걷는 모델들은 도심에 물로, 물에서 도심으로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서울을 대표하는 물의 공간이자, 도심과 자연이 공존하는 한강공원이야말로 최적의 무대였다.

또한 에르메스는 브랜드의 장인정신을 유지하면서도 동시대적 감각을 반영하는 방식을 중요하게 여긴다. 현재의 서울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어디인가에 대한 고민 끝에, 서울 시민들이 가장 자주 찾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한강공원을 선택했다. 이는 단순한 패션쇼가 아니라 서울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공간적 메시지로도 해석될 수 있다.

유사한 사례로, 에르메스는 2024 가을·겨울 컬렉션 쇼 역시 긴자 플래그십 매장과 거리를 무대로 진행됐다. 쇼에 이어 마련된 애프터파티는 도심 속 콘크리트 공원을 내세운 ‘긴자 소니 파크’로 이어졌다. 이번 한강 패션쇼도 도심 속 열린 공간에서 현대적 삶을 투영하는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이렇듯 한강은 해외 브랜드들이 주목하는 서울의 상징이 됐다. 2011년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펜디가 세빛둥둥섬에서 연 패션쇼를 시작으로, 2023년엔 한강 잠수교에서 또 다른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루이 비통이 잠수교 전체를 무대로 쇼를 개최한 바 있다. 이번 에르메스 쇼가 열리는 한강공원은 한 걸음 더 우리에게 다가온 공간이다. 지난해 한강공원을 이용한 사람 수만 8280만명이 넘는다.

기능성과 우아함의 조화

이날 선보인 2025년 봄·여름 컬렉션은 에르메스 남성복이 추구하는 현대적 감각과 전통적 장인정신의 조화를 담아냈다. 에르메스 남성복의 특징은 우아함과 실용성의 균형에 있는데, 이번 컬렉션에서는 가벼운 리넨과 실크 소재의 재킷, 여유로운 실루엣의 바지와 잘 재단된 반바지 등이 돋보였으며, 스포티한 감성과 클래식한 요소가 결합된 스타일이 주를 이뤘다. 특히 컬렉션 곳곳에서 바다와 도심을 오가는 남성의 유동성을 상징하는 요소들이 반영됐고, 한강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컬러 팔레트가 컬렉션 전반에 걸쳐 구현됐다. 또한 이번 쇼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서울 익스클루시브 제품도 함께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마구(馬具)에서 출발한 브랜드답게 말·승마와 관련된 그림이 새겨진 셔츠와 스웨터를 넓은 통 바지와 입고, 발가락이 보이는 글라디에이터 샌들을 신은 모델의 모습은 자유로워 보였다. 도심에서 이를 입고 생활하다가, 그대로 해변으로 걸어나가도 무리 없는 패션이었다. 목 부분에 작은 스카프를 부착해 리본처럼 묶을 수 있게 한 셔츠는 남색 반바지에 걸쳐 입기만 해도 멋이 살아났다. 36년간 에르메스 남성복을 만들어온 니샤니앙이 보여주는 절제된 우아함과 기능성의 융합, 이를 멋스럽게 풀어내는 레이어링 스타일이 남자들에게 '이것이 진정한 패션'이라고 외치는 듯했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개방성·역동성을 통해 에르메스가 추구하는 자유로운 남성성을 표현한 이번 행사에는 브랜드 VIP를 포함, 국내 주요 인사들이 초대됐다. 또 악셀 뒤마 에르메스 회장 겸 CEO, 디자이너 니샤니앙을 포함한 에르메스의 주요 관계자들이 직접 참석했다. 에르메스 가문의 6대손인 뒤마 회장은 “한국이 보여준 브랜드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에 감사드린다”는 말로 패션쇼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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