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은 공포죠. 친척들과 밥이라도 먹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 들어요.”
2011년부터 섭식장애를 앓은 김모(34)씨는 올해도 설 명절을 혼자 보냈다. 기름진 명절 음식을 억지로 먹게 될까 두려워 고향에 안 간지 벌써 3년째다. 김씨는 주로 물과 커피만 마신다. 고체 음식을 조금 먹고 배부르면 그대로 토하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 거식증으로 팔다리에 경련이 일어 입원한 적 있는 그는 “엄마가 제발 먹으라고 울며 애원한 적도 있지만 여전히 먹는 게 무섭다”고 말했다.
섭식장애는 폭식증과 거식증 등을 동반하는 정신과 질환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폭식증으로 입원하거나 외래 진료를 받은 환자 수는 2019년 3218명에서 2023년 4068명으로 증가 추세다. 여성 환자(3659명)가 남성 환자(409명)보다 9배나 많다. 안주란 백상식이장애센터장은 “섭식장애는 환자 본인이나 보호자가 병이라고 인지하지 못해 상담·진료를 잘 안 받는 편”이라며 “질병코드가 건강보험 급여 대상 아닌 점도 진료 문턱을 높인다”고 설명했다.
일부 섭식장애 당사자들은 설 명절을 “진한 후유증이 남는 두려운 날”이라고 말한다. 식사 강요, 외모 평가, 섭식장애에 대한 몰이해 등으로 친인척과 갈등이 빈번해 우울감이 극대화돼서다. 김씨처럼 ‘설 포비아’로 아예 고립을 택하는 환자도 적지 않다고 한다. 김현주 마음소리 심리상담 센터장은 “명절은 섭식 장애 증상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많아 환자가 20%쯤 증가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명절에 섭식장애가 악화하는 주된 원인으로 외모에 관한 사회적·심리적 압박을 꼽는다. ‘살 빠졌다’ ‘살쪘다’ ‘예뻐졌다’ 등 설 명절 인사말로 흔히 오가는 외모 평가는 식이장애 환자들의 강박을 자극한다. 폭식증을 앓은 A씨(28)는 “어른들이 언니와 나를 비교할 때마다 ‘역시 더 빼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며 “설 당일엔 보는 눈이 많아 토하지 못했지만, 이후 혼자 있을 때 폭식과 토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식사 패턴의 변화와 개입도 명절에 특히 섭식장애가 심해지는 이유다. 부모님이 정성 들여 해준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보면서 자기 혐오가 심해진다고 한다. 조모(34)씨는 “지난해 설에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고 빨리 토하고 싶어 붙잡는 부모님을 뒤로한 채 부랴부랴 자취방에 갔다”며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어서 죄책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16살 때부터 심한 섭식장애를 겪었지만 현재는 섭식장애 심리상담사로 활동 중인 이진솔(33)씨는 “명절 때면 억지로 먹은 뒤 친척 눈을 피해 풀숲에 숨어 토하곤 했다”며 “버티지 않고 자리를 잠시 피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어 “명절에 일시적으로 증상이 악화한 거로 ‘이제 끝’이라고 포기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한국 사회는 작고, 마르고, 연약한 여성의 몸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칭찬받기 위한 몸이 아니라 건강한 몸을 가질 수 있게 청소년 시기부터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안주란 센터장은 “심한 섭식장애는 강박, 도박, 알코올 중독, 성 중독 등으로 파생할 수도 있어 전문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