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사장 출신인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11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반도체 연구·개발(R&D)은 미세공정, 고밀도 집적 회로 설계 등 기술 난도가 높아 장시간 근무가 불가피하다”며 “다수의 제품 개발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해야 하므로 핵심 엔지니어들의 경우 근로시간 유연성 확보가 절실하다”고 밝혔다. 같은 달 11일에는 국민의힘 이철규 산자중기위원장이 보조금 지급과 신상품 또는 신기술 연구·개발 등의 업무 분야에서 노사 합의를 전제로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를 적용할 수 있는 이른바 ‘반도체특별법’(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을 대표발의했다. 현재 여야가 보조금 지급에는 동의하나,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주 52시간 근무 문제를 고동진 의원이 제기한 시점은 공교롭게도 삼성전자가 HBM 전용 생산라인을 짓겠다고 발표했던 즈음이다. 다시 말하자면, HBM용 반도체를 기존 메모리반도체와 다르게 설계부터 다시 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새로운 칩 설계부터 공정 과정에서 수율 향상을 신속히 해야 경쟁력 있는 HBM을 하루빨리 생산할 수 있다는 조바심 때문에, 삼성전자가 주 52시간 근무 예외를 허용해달라고 정치권에 로비를 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주 52시간 근무를 예외적으로 허용해 엔비디아의 HBM 퀄 테스트 통과를 몇달 앞당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근무시간 연장이 삼성전자의 현재 위기에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오히려 주 52시간 근무 예외 허용은 연구·개발 인력의 이직을 유발하고, 삼성전자가 환골탈태하는 변화를 외면하게 만들 수 있다.
지금 삼성전자의 위기는 2017년 즈음에 HBM을 포기한 경영진의 전략적 선택의 결과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 칩 하나의 성능을 높이는 회로의 ‘집적’을 통해 메모리반도체 부문의 선도기업 지위를 누려왔다. 그러나 집적을 통한 성능 향상은 2015년 정도에 한계에 도달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반도체 칩을 ‘집층’하는 HBM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이론에서 예측하고 노키아 사례에서 실제로 일어났듯이, 집적을 중시하는 기득권이 집층을 주장하는 새로운 기술 세력을 배제한 것이다. 그 결과 새로운 기술인 HBM은 SK하이닉스와 미국의 마이크론이라는 도전 기업이 개발에 성공했다. 이른바 AI 시대의 도래로 GPU 성능 향상과 맞물려 HBM이 반도체 메모리 부문에서 가장 수요가 급증하고 수익이 높은 사업이 되면서, 작년에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영업이익이 SK하이닉스보다 감소한 것이다.
그런데 삼성전자가 HBM에서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을 빨리 따라가도,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부문이 고사해버린다면, 메모리반도체라는 레드오션(red ocean)에서 경쟁하는 하나의 회사로 쇠퇴할 뿐이다. 2024년 세계반도체무역통계기구(WSTS)에 따르면, 시스템반도체 시장은 메모리반도체보다 3배 이상 규모가 큰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2021년 1분기 17.4%에서 2024년 3분기 9.3%로 줄었다. 이에 반해 2024년 3분기 TSMC의 점유율은 64.9%, 3위 업체인 중국의 SMIC는 6.0%로 급증했다. 첨단 제품 경쟁에서는 TSMC에 뒤지고 범용 제품에서는 SMIC에 잠식되는 ‘샌드위치’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시스템반도체 설계도 직접 하는 종합반도체 회사를 고집하는 개도기식 전략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오픈 이노베이션 시대의 혁신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삼성전자가 시스템반도체 설계를 고집하는 이상 빅테크 기업들이 최신 제품의 파운드리를 잠재적 경쟁사인 삼성전자에 맡길 이유가 없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를 병행하면서 TSMC에 HBM을 납품하겠다고 한들, TSMC는 경쟁회사와 협력할 의사가 없을 것이다. 인텔이 최근에 파운드리 부문을 분사한 것처럼, 삼성전자 사업 부문의 분사와 전문경영인에 의한 독립경영이라는 환골탈태 외에는 삼성전자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다.
이재용의 경영권 강화나 반도체특별법이 답이 아니다. 이는 ‘과거 삼성’으로의 퇴행일 뿐이다. 또 트럼프의 관세 도발에 반도체 보조금으로 대응하는 것은 관세를 더 높게 부과할 빌미만 줄 뿐이다. 반도체특별법을 주장하는 여야 정치권이 진정으로 삼성전자와 한국 반도체산업의 존망에 관심이 있다면, 이재용이 삼성전자와 한국 반도체산업의 이익에 부합하는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유인하는 정책과 법안을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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