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포르투갈 신트라에선 ‘유럽중앙은행(ECB) 중앙은행 포럼(신트라 포럼)’이 열린다.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 학자 등이 참여해 토론을 벌이기 때문에 ‘유럽판 잭슨홀 심포지엄’으로도 불린다.
지난 7월1일(현지시간) 열린 정책 토론 무대에서 독립성을 강조하는 중앙은행 관계자들이라면 ‘잊지 못할’ 장면이 연출됐다. 당시 무대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를 비롯해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 카즈오 우에다 일본은행 총재, 앤드루 베일리 영란은행 총재 등 주요국 중앙은행장 5명이 나란히 앉았다.
토론이 30분쯤 진행됐을 때 사회자인 프랜신 라쿠아 블룸버그 TV 앵커가 파월 의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고 있는데 그 공격이 일하는 걸 더 어렵게 하냐.”
파월 의장은 단호하면서도 무심하게 답했다. “나는 내 역할을 다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의연한 태도였지만 그가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받는 압박을 생각하면 다른 중앙은행 총재들은 ‘동병상련’을 느꼈을 말이었다. 파월 의장 답변 직후 중앙은행 총재들과 청중들은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라가르드 총재는 “파월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우리도 똑같이 했을 것”이라며 파월 의장을 응원했다.

중앙은행 독립성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밝힌 파월 의장을 향한 응원이 무색하게도 트럼프 대통령의 ‘연준 흔들기’가 갈수록 노골화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파월 의장을 “얼간이”라고 비난하는 등 해임 압박을 해온 데 이어 조 바이든 전 정부에서 임명된 이사들까지 흔들기 시작했다. 지난달 25일엔 주택담보대출 사기 의혹을 이유로 리사 쿡 연준 이사에게 해임 통보를 했다. 미 대통령이 연준 이사 해임 시도를 한 건 1913년 연준 설립 이래 처음이다. 쿡 이사는 “협박에 굴복할 생각이 전혀 없다”며 법적 대응에 나섰다. 최초의 흑인 여성 연준 이사인 쿡 이사의 임기는 2038년까지다.
만약 법원이 쿡 이사 해임을 정당하다고 판단할 경우 연준 이사회 장악이라는 트럼프 대통령 구상은 현실화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쿡 이사 후임으로 ‘충성파’ 이사를 앉히면 7명의 연준 이사 중 4명을 자신이 임명한 인사로 채우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기자들에게 “우리는 곧 (연준에서) 다수를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집요하게 연준을 흔드는 것은 기준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하고, 연방 정부의 국채 이자 부담을 낮추기 위해서다. 가뜩이나 재정적자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에서 기준금리가 높게 유지되면 국채금리도 높게 형성되면서 국채 이자 부담이 커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14일 백악관 오찬 행사 연설에서 “(기준금리) 1%포인트에 3600억달러의 비용이 든다. 우리는 너무 높다”며 파월 의장을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준 공격이 선을 넘어서자 ‘중앙은행의 정치화’가 물가 상승뿐 아니라 미국에 대한 신뢰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미 재무장관과 연준 의장을 지낸 재닛 옐런 브루킹스연구소 석좌연구원은 지난달 27일 파이낸셜타임스 기고에서 “시장이 연준을 정치적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곳으로 본다면 금리 결정에 대한 신뢰가 상실되고 기대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며 “쿡 이사 해임 시도는 분노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장기 국채금리를 낮추는 데 성공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높은 기대 인플레이션 때문에 장기금리가 오히려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등 경제학자 590여명도 지난 2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을 공개하고 쿡 이사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들은 서한에서 “(중앙은행 독립성 약화 시도는) 시장이 금리에 정치적 리스크를 반영하도록 해 가계와 기업의 부담을 높인다”고 짚었다.
연준의 독립성 상실은 전 세계 금융 시스템 혼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만큼 다른 국가에서도 경고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자벨 슈나벨 ECB 집행이사는 로이터 인터뷰에서 “(연준의 독립성이 상실되면) 미국이 인플레이션을 전 세계로 ‘수출’하게 될 수 있다”며 “팬데믹의 가장 큰 교훈은 각국이 글로벌 인플레이션 압력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최근 금 가격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30년 만기 미 국채금리가 5%에 근접한 것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연준 흔들기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일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연준 독립성 훼손이라는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 시장 반응이 미온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지난달 28일 자신의 홈페이지 글에서 “트럼프의 연준 공격에 대해 시장의 격렬한 반응이 없다는 것이 모든 게 괜찮다는 신호가 아니다”며 “우리는 재앙이 만들어지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