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 을사년, 그리고 을사년

2025-01-01

2025년 새해가 밝았다. 음력으로 1월1일인 이달 29일 설에 을사년이 시작된다. 60갑자로 해를 세는 우리네 전통 때문에, 2025라는 숫자보다 ‘을사년’에 눈길이 더 간다. 12지(支) 가운데 유일한 상상의 동물 용이 유연함과 장수를 상징하는 뱀에게 한 해의 바통을 넘겼다. 그러나 상상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유난히 많았던 청룡의 해였던지라, 을사년은 뱀의 유연함에 기댄 문제 풀이의 해가 될 듯하다.

게다가 2025년 을사년에는 근현대 을사년들이 남긴 문제들도 남아 있다. 역사 상식이 조금만 있다면, 을사라는 말 뒤에 으레 ‘늑약(勒約)’이니 ‘오적(五賊)’이니 하는 말들을 붙이게 된다. 1905년 일본 제국의 조선 침략을 위한 강제 협약, 즉 ‘늑약’이 있었고, 그에 따라 조선은 주권의 상징인 외교권이 박탈당했고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일본의 조선 강점은 1910년부터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실제 강점은 1905년 을사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런 점에서 1905년 을사년은 나라를 잃은 해였다.

우리가 흔히 나라 판 사람들을 ‘을사오적’이라 부르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일본에 의해 말 그대로 재갈이 물려 강제로 이뤄진 늑약이었지만, 그 와중에 자기 안위를 위해 나라를 팔기까지 한 사람들이 있었다. 좁은 의미로 을사오적은 이 늑약이 이뤄지도록 불법적으로 찬성하고 도장을 찍은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이완용, 권중현을 일컫지만, 우리 사회는 넓은 의미에서 ‘나라 팔아먹는 사람’을 을사오적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을사오적은 역사 속에 존재했던 이름을 넘어, 현재도 진행형인 이름이다. 1905년 을사년이 만든 국권 상실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로 이어졌고, 이는 우리 역사에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특히 을사오적과 그 후예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던 역사는 현재까지 질긴 악연이 되어, 문득문득 1905년 을사년을 마주 보게 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60년 뒤에 맞은 1965년 을사년이 영향을 미쳤다.

광복 이후 일본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1965년 을사년은 매우 중요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부터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회담을 시작했다. 회담 초기부터 한국은 침략에 대한 사죄와 피해 배상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역청구권 등으로 맞서면서 회담을 난항에 빠뜨렸다. 1953년 일본 측 회담 대표였던 구보다 간이치로는 ‘일본의 한국 통치가 한국에 유익했다’라는 우리에게 지금도 익숙한 망언을 통해, 한국의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기도 했다. 이 회담이 급물살을 타게 된 계기는 1961년 일어난 5·16 군사 쿠데타였다.

군사 쿠데타로 탄생한 박정희 정권은 경제 개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고, 미국 역시 냉전 체제하에서 한국과 일본이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회담은 급속도로 진전되어 을사년인 1965년 6월22일 한·일은 청구권 문제에 관해 8억달러의 돈으로 매듭을 졌다. 그 결과 한일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는 없었고,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 징용자, 독도 문제 등도 누락되었다. 1905년 을사년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1965년 을사년은, 그렇게 1905년 을사년을 배신했다.

2025년은 1965년 이후 60년 만에 다시 맞는 을사년이다. 한·일관계 관점에서 볼 때 앞선 두 번의 을사년은 아픈 역사의 되새김질이었다. 그리고 1965년 을사년에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문제는 그대로 2025년 을사년의 문제로 넘어와 있다. 1905년 을사년을 배신했던 1965년 을사년에 대해, 2025년 을사년이 다시 정리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특히 한·일관계에 있어 친일 기조 정권의 교체가 예상되고 있어, 한·일관계 역시 새로운 방향 모색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2085년 을사년이 2025년 을사년을 어떻게 기억할지 고민하면서 한 해를 열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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