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대구서 동시에 사진전 여는 민병헌

8월 10일까지 두 곳에서 민병헌(71) 사진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군산 근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민병헌 그레이’, 대구에 위치한 수목원 사유원 내 갤러리 곡신에서 열리고 있는 ‘The Contemplation(사색) in Gray’다.
한 사진가의 개인전이 동시에 두 곳에서 열리는 것도 흥미로운데, 두 곳 모두 사진전 이름에 ‘그레이(Gray·회색)’가 붙었다. 45년간 흑백 필름사진만 고집하며 촬영부터 인화까지 모두 혼자 해내는 민병헌 작가의 작업을 가장 잘 수식하는 색이 바로 회색이기 때문이다. 젤라틴 실버 프린트 위를 채운 흑과 백, 그리고 그 사이 스민 수많은 회색의 향연. 사람들은 그 미묘한 색을 ‘민병헌 그레이’라고 부른다.
“내 사진이 많이 흐리다. 대게 사진을 배울 때는 콘트라스트가 강한 사진이 좋다고 하는데, 난 일부러 경계가 애매하게 흐린 사진들을 찍었다. 이후 암실에서 직접 인화를 하면서 흑과 백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회색을 발견했고, 그때부터 완벽한 회색을 표현하기 위해 매달리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사진을 ‘컬러사진’과 ‘흑백사진’으로 나누지만 실은 흑백도 컬러다. 그리고 흑과 백 사이에 수많은 회색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눈 오는 풍경을 찍은 ‘스노우 랜드’ 시리즈를 보면 온통 눈밭이라 사진이 거의 다 하얗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속에도 밝은 회색, 하얀 회색, 어두운 회색, 더 어두운 회색 등이 있다. 그러니까 회색, 정말 그 컬러풀한 색에 계속 빠져들 수밖에 없다.”
“남 손 닿는 것 싫어” 혼자서 모든 작업

민병헌 작가는 사진을 독학했다. 고교시절 음악에 빠져 대학진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친구를 따라 얼떨결에 원서를 내고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지만 군대에 다녀온 후 복학하지 않았다. 대신 서울 신촌에서 만화방과 군고구마 장사를 하면서 우연히 카메라를 알게 됐고 흑백사진을 찍게 됐다. 이유는 하나. 현상과 인화를 남에게 맡겨야 하는 컬러사진과는 달리 흑백사진은 촬영부터 인화까지 모두 혼자 할 수 있어서다. 일흔한 살인 지금도 그는 여전히 혼자 운전을 하고, 혼자 장비를 챙겨서, 혼자 촬영을 한다. 암실에서도 혼자 인화작업을 한다. 이젠 나이도 있으니 조수를 두라고 권해보지만 “성격 상 남의 손이 닿는 걸 싫어해서”라며 손사래를 친다.
1987년 ‘별거 아닌 풍경’으로 주목받기 시작해 ‘잡초’ ‘스노우랜드’ ‘폭포’ ‘강’ ‘누드’ ‘새’ 등을 주제로 작업했다. 지금도 그는 필름을 사용하는 롤라이 플렉스 중형 카메라만 고집한다. 문제는 아날로그 카메라들이 모두 단종 돼서 더 이상 새 것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그럴까봐 미리 세 대를 사뒀는데 벌써 두 대가 고장 났어.(웃음) 흐린 날, 비 오는 날 주로 촬영하니까 물이 자꾸 스며들어서. 나머지 한 대마저 고장 나면 중고를 살 수 밖에.”
그가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설렘’ 때문이다. “사진을 찍고 바로 결과를 보는 게 너무 싫다. 배낭에 필름을 넣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내가 오늘 최고의 사진을 건졌어!’ 적당한 자만과 설렘을 느끼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아. 촬영장소도 유명한 곳이 아니다. 그저 ‘순간’ 내 눈에 들어온 ‘무엇’을 다시 만나기 위해 카메라를 이용할 뿐.”

그의 사진은 크게 ‘자연’과 ‘인체 누드’ 두 가지 주제로 나뉜다. 물론 다 흐릿하다. 그는 자신의 사진을 두고 “늘 그게 그거”라며 웃는다. “민병헌이 찍었으니 민병헌다운 사진이 나올 수밖에.” 그의 사진들은 극도로 이기적이라고 할 만큼 사진가의 개인 감정에 충실하다. “사실 자연과 사람을 분리할 필요도 없다. 사람도 자연이니까. 내게 중요한 것은 어떤 대상을 찍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대상을 만났을 때 내 감정은 어땠는가, 내가 대상을 바라보고 있을 때 대상의 상태는 어땠는가, 그게 제일 중요하다.”
그의 사진들에는 별다른 제목도 수식어도 없다. ‘새’ ‘강’ ‘스노우 랜드’ 같은 시리즈 명칭과 일련번호, 프린트 사이즈, 몇 년도 작업인지만 있을 뿐. 정확한 촬영 장소도, 시리즈를 찍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도 없다. 종종 ‘메시지가 없다’는 비평을 듣는 이유다. 물론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내가 본 무언가를 재현할 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들어줘’라고 주장하기 싫다. 그건 보는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런 그가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했다. 주제는 ‘물’과 ‘불’이다. 이 또한 그는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는데, 이번에는 주제를 만나게 된 제법 사랑스러운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걸. 내가 새로 찍은 게 아쿠아리움(수족관)이거든. 큰 아들이 제주에 살아서 가끔 내려가는데 어느 날 네 살 짜리 손녀딸이 수족관에 가자는 거다. 정말 나는 관심 없었지만 별 수 있나. 손녀가 원하는데 할아버지가 따라 가야지.”

어슬렁어슬렁 뒷짐 쥐고 따라다니다 수조에서 커다란 물고기가 움직이는 ‘순간’, 그는 어떤 물길을 봤다고 했다(어항 안에 갇힌 물에서 물길을 봤다!). 군산 작업실로 돌아와서도 수조를 따라 흐르던 안개 같은 덩어리가 자꾸 생각나더란다. 카메라 장비를 챙겨 다시 제주의 그 수족관을 찾아갔지만 내부는 너무 어둡고, 사람은 많고, 유리 반사는 심했다. “너무 아쉽더라고. 그런데 내가 또 오기는 있어서 그 다음 날 9시 수족관 문 열자마자 뛰어 들어가서 사람들이 없는 제일 끝 쪽으로 갔지. 몇 가지만 좀 해결 되면 작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 술자리에서 만난 지인이 수족관을 운영하는 기업에 이야기를 해줘서 운 좋게 한밤중에 홀로 수족관을 촬영할 기회를 가졌다. “수족관 촬영도 처음이지만 밤에 수족관에 혼자 있는 경험이 꽤 좋더라고. 왠지 이 풍경은 남겨둬야 할 것 같아 처음으로 아들을 데려가서 ‘아빠 촬영하는 모습 좀 핸드폰으로 찍어라’ 했다.”(웃음)
‘불’은 아직 머릿속에만 있다. 그가 생각한 불을 만날 수 없어서다. “포스코 용광로도, 도예가의 가마도 아닌, 뭔가 미니멀한 불을 만나고 싶은데 그게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네.”
사실 그는 하반기에도 할 일이 많다.
9월에는 사진 이미지 전문 출판사 ‘닻 프레스’에서 사진집을 낼 예정이다. 인쇄하기 정말 까다로운 ‘민병헌 그레이’를 근사치까지 맞췄다며 기대감이 크다. 출판에 맞춰 경기도 광주에 있는 ‘닻 미술관’에서 전시도 연다.
네 살 손녀딸 따라 수족관 갔다 “이거다”
9월 중순부터는 프랑스 아비뇽시에서 한 달 반 체류하며 남프랑스를 촬영하는 스케줄도 있다. 그가 양평에서 군산으로 작업실을 옮긴지 벌써 10년(그의 군산 작업실은 몇 년 전 방송에서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집’으로 소개되며 화제가 됐다). 남쪽 자연을 편한 마음으로 촬영한 시리즈가 ‘남녘유람’인데 그 사진을 본 아비뇽시에서 그를 초대했다. “프랑스의 남녘유람을 찍어보라는 건데 남프랑스가 워낙 빛이 센 곳이라 나하고는 안 맞을 걸.(웃음) 그런데 그쪽에서 오히려 ‘그것도 재밌겠다’는 거지. 나도 궁금해졌다. 그 햇빛 쨍쨍한 곳과 내 특유의 흐린 사진이 어떻게 만날지.”(웃음)
며칠 전에는 그의 ‘인체 누드’ 사진들만 전시하자는 갤러리와 미팅도 가졌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바뀐 게 없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던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찍을 뿐. 그런데 사진이든 음악이든 모든 분야가 그렇지 않나. 한 가지를 오래 하다 보면 자기 색깔이라는 게 나오게 된다. 그래서 나는 계속 반복한다. 온전한 내 것이 나올 때까지. 아마 죽을 때까지 ‘완성’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 길을 계속 갈 생각이다. 이렇게 평생을 지내도 너무 재밌고 할 게 너무 많아서 행복하다. 남들은 ‘민병헌 사진은 다 똑같아’ 할지 몰라도 나는 할수록 계속 새로운 맛이 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