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섭 전 해군참모총장의 '트럼프 조선업 러브콜' 해부
지난해 11월 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윤석열 대통령과 첫 통화에서 한·미 조선업 협력과 지원을 요청해 큰 주목을 받았다. 윤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로 촉발된 정치 혼란 와중에도 한국 조선업은 "100% 풀가동 중"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순풍을 타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HD한국조선·삼성중공업·한화오션 등 'K-조선 빅3'가 13년 만에 동반 흑자를 거뒀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이처럼 역동적 상황에서 오는 20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한·미 조선 협력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까, 한·미 동맹에는 어떻게 작용할까.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정호섭(67) 울산대 초빙교수의 분석과 전망을 들어봤다. 영국 랭커스터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전역 이후 미국의 해양전략과 미·중 해양 패권경쟁 등 해양 안보 이슈를 꾸준히 연구⋅분석하고 있다.
트럼프, 세계 2위 조선강국의 실력 인정
-트럼프 당선인은 왜 불쑥 한·미 조선업 협력을 꺼냈을까.
“한마디로 서태평양의 해양안보에 짙은 먹구름이 끼었기 때문이다. 과거 ‘민주주의의 무기고’였던 미국의 해양력이 크게 쇠퇴하고, 해양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중국이 미국의 군사⋅경제 패권에 거칠게 도전하고 있다. 조선업과 해운업까지 미국이 중국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추세다. 미국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라 트럼프가 한국에 구조 요청(SOS)을 한 것이다.”
중국의 해양 패권 도전 직면한 미국
트럼프, 한국에 '조선업 살리기 SOS'
'존스법'·신자유주의에 조선 붕괴
항모 수리 위해 5년 대기할 정도
장기간 시설·자본·기술 투자 필요
MRO 비용, 한국에 떠넘길 수도
-미국이 주목하고 인정하는 한국 조선업의 강점은.
“한국은 세계 2위 조선 강국으로서 최첨단 함선을 값싸고 빠르게 건조하는 역량이 탁월하다. 한국 조선소들은 대형 상선부터 군함·특수선박까지 고품질 선박 건조에 필요한 모든 인프라를 구축했고, 기술과 경험이 풍부하며 비용 절감 효과도 우수하다. 고객이 원하는 납기를 정확하게 맞춰준다."
-몰락한 미국 조선산업의 현주소는 어떤가.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미국은 효율성을 추구하며 해군 함대 규모를 줄곧 축소해 왔다. 해군조선소는 기존 11개에서 4개(태평양·대서양에 각 2개)로 줄여 운용한다. 4개 조선소에서도 함선을 건조하지 않고 항공모함·핵잠수함 등 핵전력의 유지⋅보수만 전담한다. 그러나 시설과 장비 노후에다 용량 부족, 전문 인력의 높은 이직률 등으로 쌓여 있는 유지⋅보수 처리에만 20년이 걸린다. 이런 상태에서 만약 중국과의 무력 분쟁이 발생할 경우 미군은 해군 함선 '급증(surge)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이는 한반도 유사시 안보에도 악영향을 줄 대목이다.”
미국 상업조선도 기반 무너진 상태
-군함 등의 MRO(유지·보수·운영) 차질이 어느 정도인가.
“미국 해군의 공격잠수함 54척 중에 약 18척이 수리하기 위해 조선소에서 대기하고 있다. 사실상 작전 불능 상태다. 1992년 취역한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함은 중간 연료 교환 및 정기 수리를 위해 조선소에서 5년 이상 대기하다가 최근에야 수리를 마치고 미 7함대로 복귀했다. 함선의 유지⋅보수 지연으로 새로운 함선의 건조도 수년간 지연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예컨대 항모는 계획보다 18∼26개월, 버지니아급 공격잠수함은 2∼3년이 지연되고 있다.”
-해양강국 미국이 어쩌다 이렇게 됐나.
“1981년 취임한 레이건 정부가 신(新)자유주의 기조를 내세우며 조선업에 대한 정부 보조금을 철폐한 영향이다. 그때부터 미국 조선업은 감당할 수 없는 인건비와 세금, 환경규제 부담, 노동력 부족 등으로 거의 파산했다. 1920년 제정된 존스법(Jones Act), 즉 ‘미국 항만을 오가는 모든 국내 해운 선박은 미국에서 건조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미국 조선소는 국제경쟁력을 상실하고 상업조선 기반은 거의 무너졌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자만 때문인가.
“1990년대 초 미·소 냉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향후 패권 도전 세력이 없을 거라 과신했다. 방위산업을 통⋅폐합하고 군수 제조업을 축소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약 20년간 미국은 중동에서 대(對)테러 전쟁에 8조 달러(약 1경1756조원)를 쏟아부었다. 미국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해군력에 제대로 투자하지 못했다. 반면 중국은 미국의 위기를 전략적 기회로 활용하면서 해양력 건설에 집중했다. 미국의 전략적 패착이 중국의 군사적 도전을 자초한 셈이다.”
덩샤오핑, 전략 산업으로 조선업 육성
-중국의 조선·해양 역량은 어느 정도인가.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무역 대국으로 급부상하면서 해양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조선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했다. 2022년 중국(홍콩 포함)은 세계 최대 어선단과 6218척의 국적 외항상선을 보유한 세계 1위 해운 대국이 됐다. 미국 해군정보국(ONI)에 따르면 중국은 미국의 232배나 되는 조선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은 해군·상업의 이중 목적 대형조선소 20개, 드라이 독 130개 등 전 세계 대형선박 건조 시설 300개 중 약 180개를 보유해 전 세계 신규 대형상선의 54%를 건조하고 있다. 중국은 전 세계 해양산업 공급망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고 있다.”
-해양전략가 앨프리드 마한(1840~1914)의 가르침을 어겼나.
“마한은 국가권력이 부(富)에서 나오며 부는 역사적으로 강력한 해군에 의해 보호되고 장려된 자유무역과 연결돼 있다고 그는 역설했다. 마한에 따르면 '섬나라 미국'은 경제와 안보를 강력한 해양산업에 의존하는데도 지금 미국 무역량의 약 0.4%만 미국 외항선을 통해 수송된다. 전시에 미군 전력을 분쟁 현장으로 수송하는 상선단이 부족하다. 미국은 조선업과 해운업 등 해양산업이 ‘해양력(Sea power)의 무기고’라는 마한의 가르침을 망각했다."
-존스법을 폐지하면 되지 않겠나.
“폐지는 어렵다. 국제경쟁력을 상실한 미국 조선산업이 완전경쟁 시장에 노출되면 미국이 유사시 운용할 수 있는 선박과 선원까지 완전히 없어지게 된다. 다만 이법에 따라 미국 국내에 조선업 기반시설이 없는 한국 조선기업의 경우 미국 해군의 함정 건조 사업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당분간 어려울 것이다.”
-한국은 어떤 분야 진출이 가능할까.
“항모와 핵잠수함의 건조 및 유지⋅보수 지연 문제가 가장 심각하니 미국은 해군조선소의 추가 건설, 드라이 독 시설 대폭 확장 및 현대화 공사가 시급하다. 이는 미국 정부가 할 일이다. 그런데 국가 부채가 35조 달러를 넘어 조선산업 재건에 가용한 정부 예산이 부족하다. 한국 조선업계가 몇몇 미국 민간조선소에 자본과 기술을 투자하는 방식, 즉 공동소유 구조를 구축해 시설 및 자본재의 현대화를 촉진해주고 전문인력의 교육⋅훈련이 포함된 첨단 기술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협력위' 구성하고 원팀으로 대응을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국무장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각각 내정된 마르코 루비오 상원 의원과 마이크 왈츠 하원 의원은 지난해 4월 중국의 해양 패권 도전에 따른 미국의 대응을 촉구한 '미국 해양전략을 위한 의회 지침’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미국 의회는 지난해 12월 ‘미국 번영과 안보를 위한 조선업 및 항만시설법(SHIPS for America Act)’을 초당적으로 발의했다. 트럼프는 이런 노력에 힘을 싣고 있다.
-트럼프가 한국 조선업에서 노리는 것은.
“그는 협상의 달인이다. 한국을 ‘머니 머신(Money machine, 현금 인출기)’이라 부를 만큼 한국이 방위비를 더 많이 부담해야 한다고 언급해왔다. 취임 이후 추진할 미국 조선산업 재건에 한국의 적극적인 지원⋅협력을 요구하려는 압박 전술이자 협상 포석일 수 있다. 한국에 더 많은 미국 해군함정 MRO를 맡기고 비용을 방위비 분담 차원에서 한국에 부담시키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한국 조선업체들의 미국 진출에 숨은 리스크는.
“한·미 조선업 협력에 대해 요즘 한국에서는 대박·금맥·황금알 등 기회를 강조하는 장밋빛 환상과 기대가 넘쳐난다. 물론 미국의 조선산업 재건에 한국이 참여하면, 한⋅미 동맹의 강력한 접착제가 될 수 있다. 다만 단기간에 미국 조선산업의 경쟁력 회복이 그리 쉽지 않다. 미뤄온 대규모 시설⋅자본·기술 투자에 장기간이 필요하다. 전문인력 양성, 인건비, 환경규제 부담 등 난제가 많다. 어떤 경우든 한국의 지원⋅협력이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식이 되면 곤란하다.”
-한국 정부의 전략을 조언한다면.
“한국의 국익과 기업 수익을 보장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국가정책 차원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는 ‘조선 협력 위원회’를 구성하자. 자본⋅기술 투자를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기업⋅전문가의 다양한 의견을 종합해 '원팀'으로 협상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특히 미국 의회가 발의한 새로운 조선법의 법안 처리 과정은 물론, 곧 출범하는 트럼프 2기 정부가 미국 조선산업 재건을 위해 정책적으로 보조금 부활이나 세제 혜택 등 어떤 정책 조치를 발표하는지 주시해야 한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리더십 공백은 너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