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족관에서 건진 인생 사진

2025-02-05

내 가장 오래된 사진은 창경원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엄마 등에 업힌 걸 보아 두어 살 무렵. 한복 차림의 할머니, 선글라스로 멋을 낸 할아버지와 함께다. 뒤로 곰 우리와 모노레일이 보인다. 창경궁이 아니라 창경원이었던 시절. 창경원은 동물원, 동물원은 원숭이, 구경거리가 있는 놀이공원 혹은 유원지.

처음 수족관에 간 날을 기억한다. 63층 건물이라니, 전망대까지 삼십 초 엘리베이터라니, 돌고래와 인어 쇼라니. 소문이 자자했다. 구경 한번 가보자 조르고 조르다, 결국 오빠와 나, 어린이 둘이 손 붙잡고 갔다. 사람이 얼마나 많고 줄은 얼마나 길던지 전망대 엘리베이터는 못 타고 수족관만 들어갔다. 수조 속 물고기보다 어른들 등짝을 더 많이 본 기억. 그나마 어린이 눈높이에 있던 전기뱀장어. 감전되면 어쩌나 걱정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63은 수족관, 수족관은 인어쇼, 인어쇼는 돌고래, 돌고래는 물개박수, 동물 쇼 시대를 여는 문.

동물 쇼 전성시대 옛말인가

벨루가 방류 약속 깬 롯데월드

항의 환경단체에 7억 손배소

수족관 사진은 학대의 현장 사진

물개 쇼 대공개, 마지막 승부를 결정짓는 덩크슛, 재치와 익살 넘치는 표정까지, 재롱둥이 바다표범과 수중 쇼를 펼치는 인어아가씨, 남극의 신사 킹펭귄 서울서 첫선, 바다의 재주꾼 알래스카 해달 조개잡이로 변신, 살아 있는 장난감으로 불리는 판다와 해달이 한국에서 재롱을 견준다, 돌고래들 봄맞이 쇼 앞두고 고난도 훈련 중, 거액 들여 사 온 해달 애물단지로 전락, 재롱 안 떨고 하루 5끼씩 비싼 먹이만 먹어 치우지만, 희귀 동물 보호에 따라 소홀 못해….

당시 신문 기사 제목들이다. 재롱도 안 떨고 밥만 축내는 식충이 애물단지 해달의 한 달 식비가 1000만원. 훨씬 저렴하게 수입한 물개는 재주도 잘 부리고 인기도 많은데 식비는 해달의 30%라고, 누구 쇼가 더 경제적인지 셈을 하는 기사도 있다. 오랑우탄 마술쇼와 훌라후프를 통과하는 돌고래와 공을 차는 바다사자와 자전거 타는 원숭이와 허들을 넘는 곰이 어린이들을 유혹하는 시대. 전문 동물 쇼장을 만들기 위해 맹수사 자리를 헐고. 겨울철에도 공연이 계속되도록 에어돔을 설치하고. 전천후 동물 쇼를 자랑하는 그야말로 동물 쇼 전성시대.

물개에서 물범으로 돌고래로부터 벨루가까지. 수족관은 더 화려해지고 전시 동물은 다양해지고 풍부해졌다. 동물원 수족관에서 동물 쇼를 금지하는 법률 개정이 이루어진 것은 2022년. 쇼는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생태설명회를 내세운 전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수족관은 벨루가, 벨루가는 인생 사진, 낭만적인 데이트 코스, 벨루가가 당신을 보고 웃어주었다. 진정 그러한가. 당신의 인생 사진 속 벨루가는 누구인가.

롯데월드 아쿠아리움은 2013년 벨루가 세 마리를 수입한다. 1년 7개월간 지름 10m 송어양식장에 가둬 두었다가 아쿠아리움으로 옮긴다. 벨로·벨리·벨라 이름도 지어준다. 16년에 벨로, 19년에 벨리가 죽고 벨라 혼자 남는다. 벨라까지 죽일 셈이냐. 죽기 전에 바다로! 피켓 시위가 이어지고 여론이 들끓었다. 롯데월드는 2022년까지 벨루가를 방류하겠다 발표한다. 약속 발표를 한 지도 어언 5년. 약속대로라면 벨루가는 지금쯤 바다로 돌아갔어야 한다. 방류까지는 안 되었다면, 적어도 아이슬란드 야생 적응장에는 가 있었어야 맞다.

지난해 환경단체가 수족관 내에서 기습 시위를 벌였다. 약속을 지켜라. 현수막을 수조에 붙이고 5분간 시위를 벌였는데, 이에 롯데 측은 손해배상 소송으로 응수했다. 현수막을 부착해 전시 기능을 상실케 했고, 현수막은 제거했지만 접착제가 남아 수조에 해를 입히고 재물을 손괴했으니 7억 3400만원을 배상하라. 스티커 자국 지우는 데 7억. 벨루가 방류 촉구 행동이 유죄인가. 부여된 책임과 약속을 지키지 않은 기업이 유죄인가. 지난달 판결이 났다.

“수조에 보유 전시하는 행위가 벨루가 습식에 반하는 점, 수년 전 약속했지만 방류를 이행하지 않고 진행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기업으로서 인권과 동물권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부여된다.”

기업의 책임을 강조한 대목이다. 아쿠아리움 내부로 들어가면 안내문이 곳곳에 붙어 있다. ‘해양 동물을 보호해 주세요. 우리는 생명을 존중하고 함께하는 방법을 생각합니다.’ ‘서식지에서 6000㎞까지 이동하는 벨루가를 7.5m 수조에 보호하고 있습니다. 벨루가를 바다로 보내려 애쓰기 위해 벨루가를 볼모로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 존중과 함께하는 방법이랍니다.’

수족관에서 건진 벨루가 인생 사진은 학대의 현장 사진이다. 어쩌겠는가? 동물애호가들이 시끄럽게 굴어서 벨루가를 바다로 돌려보내기 전에 냉큼 가서 사진이라도 남겨두어야겠는가? 아이들에게 자 봐라, 저 희고 아름다운 벨루가가 너를 보고 웃고 있다 말해 주겠는가?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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