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백봉 신사상’ 건너 뛰기

2025-12-05

올해로 27회를 맞는 백봉 신사상 시상을 한 해라도 중단하자는 기사가 나왔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후보 추천 설문지를 받았는데 합당한 의원 찾기가 어려워 난감했다고 하며 올해는 시상을 건너뛰어 22대 국회의원 전원에게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독자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로 엇갈렸다. 부정적인 반응이 더 많았다. “상의 고결함과 시대적 메시지를 위해서는 한 번쯤은 안 하는 것도 좋겠다.” 수적으로 조금 열세이지만 그래도 시상을 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반응들도 있었다. “이럴 때 일수록 상을 주어 다른 의원들에게 거울이 되게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상 받을 국회의원 찾기 어려워

올 시상식 없애자는 의견 팽배

자신과 집단 이익에만 집착 말고

협의와 절충의 정치를 펼쳐야

실은 이렇게 엇갈린 의견들은 처음이 아니고 이 상의 설립 논의 때부터 계속 있어왔다. “우리나라 국회에 무슨 신사가 있겠나. 차라리 ‘깡패 상’을 만들어 못되게 구는 녀석들을 창피라도 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후일 의장이 된 다선 의원의 말이었다. 모두 웃었지만 이 말에 찬동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의회정치의 본령과 국회의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품성과 행동에 대한 절실한 뜻이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이란 항상 좋은 행적에 관한 인지와 포상만은 아니다. 시상에는 늘 기대와 장려의 의미도 큰 몫을 차지한다. 이 상을 시작한 지 사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사이에도 긍정적인 의견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상자 발표가 나오면 대부분 수상자에게 관하여 긍정적인 반응들이었지만 간혹 이견이 있기도 하였다. 수상자 중에는 수상 이후에 언행을 조심하거나 발언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는 분들도 있었다. 주최 측은 조금이라도 더 평가의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조사 방식을 개선해 왔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모수(Population)를 출입기자단에 국한하였는데 그 후 사무처 직원들도 포함하여 설문지를 돌린다. 근래에는 의원들, 즉 동료 집단(Peer Group)의 평가도 묻는다. 시상을 보류하자는 제안에 대한 찬반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시상은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일말의 불안한 마음은 억누르기가 어렵다.

얼핏 1차 대전 이후 공화국으로 된 오스트리아의 경우가 생각난다. 이 나라는 사회민주당과 기독 사회당이 각기 자신들의 지지층에만 매몰되어 매사에 극한적으로 대립하며 타협과 화합은 커녕 나라를 완전히 양분하다시피 하였다. 정치학자들이 ‘기둥(柱)화(Verzuiling)’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이래선 그 나라가 당시 엄중한 주변 상황을 헤쳐나갈 수 없었다.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나치 독일에 합병되어(Anschluss), 2차 대전에서 희생만 치르고 패전국으로 전락하는 운명이 되었다. 다투기만 하던 정치인들이 결국 나치의 정치범 수용소에 함께 갇혔는데 거기서 크게 반성들을 하고, 앞으로 정치 참여의 기회가 있으면 그때는 다투지 않고 잘 해보자고 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사회에 ‘기둥화’ 현상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국정이 분열과 갈등으로만 치닫는 것은 아니다. 분열과 갈등이 항상 나쁜 것만도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가 한 차원 높게 발전하는 토양이 된다. 오히려 갈등을 억눌러 버리기보다 정치의 영역에서 그대로 표출하여 사회가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발전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정치이다. 같은 유럽 나라 중 벨기에나 네덜란드의 경우는 정치인들이 사회적인 ‘기둥화(다른 민족·언어·문화·경제 등의 차이)’의 분열과 갈등을 정치에서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타협과 화해 그리고 발전의 계기로 만든다. 이런 현상에 관하여 ‘협조(concertation)의 정치’ ‘협의(consociation)의 정치’ 등의 용어가 있지만(졸저 『현대 서구 정치론』) 중요한 것은 이런 사례들에서 보는 것처럼 정치인들이 사회의 갈등적인 요소를 중앙 정치에서 재현하기보다, 더 높은 차원의 해소와 화합으로 지양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사라는 명칭에는 그저 본인의 사적인 처신이나 언동의 예의 바름만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신분에 맞는 응분의 사회적인 책임이나 역할을 한다는 뜻도 있을 것이다. 신사 정치인이라면 그저 자신의 지지 집단의 의사나 이해관계만을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자기들과는 다른 집단과 협의하고 절충하여 모두에게 더 나은 대안을 마련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사회적인 갈등도 나라가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갈등을 억눌러 버리기만 하는 사회는 오히려 정체되기 쉽다.

근세조선 시대 정치의 주역들은 모두가 당시로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학문뿐만 아니라 인품도 존경받는 선비, 즉 오늘날의 신사에 비교할 만한 분들이었다. 그러나 정치의 영역에서 이들은 자주 파벌을 이루어 당쟁을 벌이고 한편이 집권하면 다른 편을 숙청하는 것이 흔한 행태이었다. 그러는 사이 나라 밖에 긴급하게 돌아가는 사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평소에 한 수 아래로 보던 이웃 나라에 국권을 침탈당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국제적인 상황도 100여 년 전 지난 날의 어려움에 뒤처지지 않는 엄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희망은 신사 정치인들에게 걸려 있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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