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프트 파워(soft power·연성 권력)’는 미국 하버드 대학의 조지프 나이 교수가 주창한 개념으로,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하는 능력을 말한다. 군사력 같은 물리적 힘(hard power·경성 권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나 보편적 가치관 등을 통해 공감을 이끌어내어 자연스럽게 동조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간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의 덕도 있지만, 인권 존중 등 보편적 가치관과 민주주의 규범이 잘 지켜지는 사회, 그리고 인기 있는 대중문화로 인해 미국이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소프트 파워의 힘도 컸던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그동안 유무상 해외 원조와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통한 해외유학생 유치 등의 노력도 기울여왔다.
상대방의 자발적 동의 끌어내는 힘
소프트 파워도 군사력만큼 중요해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관심 밖으로
한국 정치인도 말 바꾸기 조심해야
그런데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두 번째 취임한 이후, 이러한 노력은 거의 모두 폐기된 듯하다. 우선 해외 원조를 담당하던 미국 국제개발처(USAID)를 폐쇄하려 하고 있다. USAID는 과거 한국에도 많은 지원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의 과학입국을 이끈 KAIST 설립을 위한 차관 제공이다. 그 외에도 상하수도 시설, 발전소, 시멘트 공장 등 다양한 인프라를 지원한 바 있다. 그런데 미국 정부효율부(DOGE)를 이끄는 일론 머스크는 지난 2월 “USAID가 돈 낭비이고 좌파 의제를 지원한다”고 하면서 대부분의 직원을 해고했고,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도 “많은 경우 USAID는 국가 전략에 반(反)한다”면서 대폭적인 기구 축소나 해체를 예고했다. 또한 풀브라이트 장학금 지급도 정지됐다. 당장 미국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예산은 무조건 줄이겠다는 의도인 것 같다.
세계 각국의 인재를 끌어들여 새롭고 혁신적인 아이디어의 보고(寶庫) 역할을 하는 연구중심대학에 대한 지원도 줄이고 있다. 보건 의학 분야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국립보건원(NIH)과 기초과학 연구를 지원하는 국립과학재단(NSF)의 예산을 대폭 삭감하면서 조직 자체를 축소하고 있어서 연구비 삭감이 영구적일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우리에게도 바로 영향을 미쳐 이공계 학생들의 미국 유학과 박사후연구원 취업의 기회가 막히고 있다. 연구비가 줄어들자 많은 연구자가 미국 대학을 떠나 유럽이나 캐나다로 이주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과거 2차대전 후 미국이 유럽의 과학자들을 대거 영입하여 미국 과학 수준을 대폭 높였는데, 이제 이에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외국인 유학생이나 방문 연구원들은 비자가 명백한 이유 없이 무효화되기도 해서 불안에 떨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세계의 인재를 빨아들이기 어려울 것은 명백하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미국 대학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간섭은 연구비 삭감으로 끝나지 않는다. 캠퍼스에서의 반(反) 유대주의 운동을 충분히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학 행정에 간섭하려 하고,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을 폐지하지 않으면 정부 보조금을 삭감하겠다고도 위협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이를 보다 못한 하버드 대학을 비롯한 대학 총장 등 269명이 정부의 간섭이 학문의 자유를 위협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을 규탄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마이동풍이다. 인종 등 세상의 편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학문의 전당이라는 미국 대학의 이미지가 산산이 깨어지는 중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현실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트럼프 행정부의 성향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된다. 물론 해외 원조나 유학생에 대한 장학금 지급, 기초연구 지원 등이 당장은 돈이 나가기 때문에 미국에 손해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이러한 투자가 커다란 자산이 될 수 있다. 조지프 나이 교수는 이를 ‘소프트 파워’라는 개념으로 설명했고, 그 효과는 오랜 기간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에 신뢰성(credibility)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경우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에 대한 말 바꾸기나, 동맹국과의 방위조약도 이해득실에 따라 번복할 수 있을 듯 보인 것이 소프트 파워 하강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최근 K팝이나 K드라마 등 한류 덕분에 소프트 파워가 상당히 올라가고 있다. 단기간에 성공한 산업화와 민주화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조사에서는 우리나라의 소프트 파워가 세계 1위로 평가된 일도 있다(IMF 글로벌 소프트파워 지수 2021). 그러나 이러한 추세도 장기적인 신뢰가 없으면 유지되기 어렵다.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쉽게 말을 바꾸는데, 국제관계에서 말 바꾸기는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여러 민초(民草)들이 힘들게 쌓아 올린 국가의 소프트 파워를 정치인들이 까먹지 말기를 바란다.
오세정 전 총장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