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탐구 1990년대
20세기 대한민국은 놀라운 경제성장만큼이나 그늘도 짙었습니다. 물질적 외형은 커졌지만, 빈부 격차와 사회 갈등의 확대로 분노 범죄가 판쳤습니다. 그 절정에 ‘지존파’가 있습니다.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실행하자며 결성한 국내 최초 살인범죄 조직 지존파에 1993~94년 5명이 희생됐습니다. 30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는 ‘묻지 마 흉악 범죄’의 위험에 노출돼 있습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양극화가 초래할 부작용도 우려됩니다. 당시 지존파를 체포했던 한기수 형사를 만나 ‘검거 48시간’의 긴박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봅니다. 괴물 같은 그들의 모습에서 현재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보일지 모르니까요.
삐리리리 삐리리리….
잠복 중인 서초경찰서 강력반 한기수 형사의 주머니에서 삐삐가 울렸다.
반장님도 참, 뻗치기할 땐 삐삐 치지 말라니까.
입이 댓발 나온 한 형사는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 수화기를 들었다.
야! 완전 비상이야, 빨리 들어와.
반장님, 뭐, 뭐 때문에….
뚜 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1994년 9월 16일 새벽, 잠복 중이던 한 형사는 차를 몰아 경찰서로 들어갔다.
하얗게 겁에 질린 20대 여성이 횡설수설 이야기를 늘어놨다. 제정신이 맞나? 한 형사는 여성의 양쪽 팔을 들어 살폈다. 다행히 ‘약쟁이’는 아니었다.
제보자 이름은 이영순(27·가명). 8일 전 카페에서 함께 일하던 남성과 새벽에 납치됐는데, 혼자만 가까스로 탈출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을요?
피해자들의 공통점은 당시 고급 승용차였던 그랜저의 차주. 공포 소설 같은 이야기에 한 형사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신문에 이영순이 말한 교통사고 기사가 실렸다. 절벽으로 굴러떨어진 승용차에서 시신이 발견됐는데, 목격자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고 진술했다. 한 형사는 왠지 모를 싸한 기분이 들었다.
경찰서로 간 한 형사는 전날 맡긴 핸드폰 감식 결과를 들여다봤다. 피해자 이영순이 도망치면서 갖고 나온 핸드폰 명의가 전과자의 것으로 확인됐다. 이영순이 진술한 고문·살해 수법은 강력반 베테랑 형사들에게조차 매우 낯설었다.
한 형사와 고병천 반장 등 강력계 형사 7명은 서둘러 짐을 꾸렸다. 추석 연휴라서 피의자들이 혹시 뿔뿔이 흩어지진 않을까 우려해 곧장 전남 영광에 있다는 범죄 아지트로 내려갈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18일 밤 11시쯤 서초서를 출발했다. 피해자인 이영순도 동행했다. 단서라고는 오직 그녀의 제보 하나뿐.
6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한 영광의 집은 너무 평온했다. “집이 너무 예쁜데….” 마치 어린아이 여럿을 키우는 단란한 가정집 같았다. “번지수가 틀렸나?” 형사 한 명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때까지 바닥만 내려다보던 이영순이 흘깃 창밖을 내다봤다. 그러곤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혹시 범죄자들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었던지 이영순은 곧장 고개를 떨궜다.
19일 새벽 5시. 형사들은 아지트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차량 3대로 나눠 잠복을 시작했다.
더 가까이는 못 가겠는데요.
아지트 주변은 휑하게 뚫린 논바닥. 먼 거리에서 몸을 숨긴 한 형사는 동료와 번갈아 쌍안경으로 동태를 살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뭐야. 저거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