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법원 "발달장애인도 투표 보조 허용"…그래도 문턱 높다

2024-10-15

10·16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선거관리위원회가 발달장애인에게 투표 보조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제29민사부(부장 고승일)는 발달장애인 노모씨와 한모씨 등 2명이 지난해 3월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투표보조 정당한 편의 미제공 차별구제 청구소송’에서 선관위가 발달장애인의 투표 보조를 허용하지 않는 행위는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정당한 편의 제공을 거부한 것이라고 지난 10일 판결했다. 재판부는 선관위가 관리하는 선거와 국민투표에서 “노씨와 한씨 등에게 가족 또는 이들이 지명하는 2명의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선관위가 제작·배부하는 투표관리 매뉴얼에 ‘발달장애인의 투표를 보조해야 한다’는 내용을 명시하라”고 주문했다.

노씨 등은 각각 2022년 3월 제20대 대통령선거와 2022년 6월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소에 방문했다. 하지만 혼자 투표하기 어려워 선관위 소속 투표사무원에게 투표 보조를 요청했지만 신체 장애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한다.

공직선거법 157조 6항은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자신이 투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해 투표를 보조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20대 총선이 열린 2016년까지만 해도 지적·자폐성 장애 등 발달장애인도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다는 선관위 지침이 있었다. 하지만 21대 총선이 열린 지난 2020년 이 지침 내용이 변경되면서, 청각·발달장애인 등은 장애등록 여부나 장애 유형과 무관하게 투표사무원이 투표 보조 여부를 판단하도록 했다. 발달장애인들은 이때부터 현장 사무원 재량에 따라 투표 보조를 거부당하는 일이 빈번해졌다고 말한다.

재판부는 157조 6항을 해석할 때 장애인 참정권을 보장하려고 마련된 입법 취지를 고려하면 시각·신체장애인 외에 발달장애인도 포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조항의 취지가 장애인을 위해 공직선거법이 규정한 거소(우편)투표, 시각장애인용 공보물, 특수 투표용지 등 구제조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발달장애의 유형과 특성을 고려할 때 투표 보조는 국가가 제공해야 하는 정당한 편의에 해당한다고도 판단했다. 정도 차이가 있지만 발달장애인은 투표소와 같이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긴장과 두려움을 느끼거나, 사진 없이 기호와 이름만 기재된 투표지를 보고 투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선관위는 “현장 투표 사무원이 발달장애인의 신체장애 등 확인 절차를 거쳐 보조 편의를 제공할지 판단한 것은 헌법상 비밀투표 원칙 등을 실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발달장애인의 의사결정 능력평가는 전문가의 장기간 관찰과 평가를 통해 이뤄져야 하는데, 현장 투표사무원이 단시간에 그 여부를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며 합리적 이유가 없는 차별이라고 봤다.

이런 판결에도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도 일부 발달장애인의 투표 보조 요구는 여전히 거부되고 있다. 발달장애인 A씨(38)는 지난 12일 서울 은평구의 사전투표소를 찾았다. 투표지에 교육감 숫자와 이름만 있어 구별이 어려워 어머니의 도움을 받겠다고 투표 사무원에게 요청했지만 제지당했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은 발달장애인 등 지적 장애인도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공직선거법 일부 개정안을 지난달 30일 대표 발의한 상태다.

선관위는 즉각 항소 의사를 밝혔다. 선관위 관계자는 “발달장애인의 투표 보조 허용은 투표 편의 확대 측면이 있지만 투표의 비밀침해와 대리투표 우려도 있다”며 “지난해 10월 부산지법에선 이번 판단과 배치되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상급심의 최종 판결을 받고자 한다”고 했다. 이어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투표 보조를 요청하는 경우 가급적 투표 보조를 허용하겠다는 방침”이라면서도 “선거인이 혼자서 투표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거나 대리투표가 의심되는 경우엔 투표 보조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소송을 대리한 한상원 변호사(공익법단체 두루)는 “이번 판결은 법원이 발달장애인에 대한 선관위의 투표 보조 거부가 차별이라는 점을 명확히 확인한 것”이라며 “선관위는 판결에 따라 즉각 발달장애인에게 투표보조를 허용하고 관련 매뉴얼을 개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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