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세계와 만남…우린 얼마만큼 포용했나

2024-10-10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 맞아 양국 작가 8명 집필 참여

전세사기 피해 난민 우주사절단 등 8가지 이야기 펼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해 |

김멜라 외 지음 |윤진·홍한별 옮김 |민음사 |308쪽 |1만7000원

아내를 따라 스키를 타러 간 ‘나’는 우연히 리조트 휴식 공간에서 젊은 남자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들은 이틀 전, 스키장 화장실 변기 구멍에 빠져 밤새 갇혀 있었다는 한 남자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밤새 정화조 안에 있다가 아침에서야 구출됐다고 했다. 그 남자의 사연은 젊은이들에게 “똥오줌이 가득한 풀에서 수영하면서 암울한 밤을 보내긴 했지만 멀쩡해”라는 떠들썩한 조롱거리쯤으로 취급되지만, ‘나’는 2년 전 다른 리조트에서 들었던 똑같은 이야기를 떠올린다. ‘나’는 이상한 생각에 화장실을 조사하게 되고, 설치된 변기의 구멍 크기는 실수로 사람이 빠지기에는 너무 작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스키장 직원을 통해 그 남자가 압디카림 게디 하시, 바로 2년 전 같은 사고를 겪었던 그 남자라는 것도 알게 된다. 성인 남자는 도저히 실수로 빠질 수 없을 것 같은 변기 구멍에 그가 두 번이나 빠진 것은 그저 불운 때문이었을까.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을 맞아 두 나라 작가 8인이 참여한 앤솔러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해>가 출간됐다. 한국에서는 김멜라, 김애란, 윤고은, 정보라 작가가, 캐나다에서는 작가 리스 버드윌슨, 얀 마텔, 조던 스콧, 킴 투이가 참여했다. 작가들은 ‘다양성 그리고 포용과 연대’라는 주제 아래에 여덟 개의 이야기들을 펼쳐놓는다. 각각의 작품들에는 전세 사기 피해자, 이민자, 난민, 선주민 혼혈인, 외국인 노동자부터 에너지를 빛으로 감지하는 사람, AI로 간주된 노동자, 우주 사절단까지 다양한 정체성과 역사를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에게 관성적으로 작동했던 경계와 고립, 차별의 기제들은 타자와의 조우, 혹은 낯선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균열이 가고, 작품들은 그 같은 순간들을 인상 깊게 포착해낸다.

화장실 변기 구멍에 빠진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머리 위의 달’은 2002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소설 <파이 이야기>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작가 얀 마텔의 초단편소설이다. ‘나’는 수소문 끝에 아직 리조트에 머무는 압디카림 게디 하시를 찾아가고, 그가 소말리아 출신이며 내전을 피해 에티오피아 난민촌에 머물다 종교 단체의 지원으로 8년 만에 캐나다에 오게 됐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그에게 ‘변기 사고’에 관해 묻지만, 그저 미끄러졌을 뿐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만을 듣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며 그에게 가족과 같이 놀러 왔느냐고 의례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뜻밖에 그는 돌연 화가 난 격렬한 어조로 답변을 하기 시작하고, 그가 숨기려 했던 사고의 진실도 드러난다.

반전처럼 마지막에 그가 털어놓은 말들은 길지는 않지만, 깊은 여운을 남기면서 때로는 무관심하고 때로는 짐작할 수 없었던 난민이 겪은 상실의 경험과 그 트라우마를 조금이나마 헤아려 보도록 한다. 작가는 “고향이 너무 그립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난민이 되어 더 살기 좋은 곳에 와서, 이곳의 삶에 감사하면서도 자기가 태어난 곳, 본디 속해 있던 곳이 여전히 너무나 그립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며 소설을 썼다고 전한다.

‘머리 위의 달’이 타자와의 만남으로 자신의 경계나 경험 너머로 나아가는 지평을 열어 보인다면, 정보라 작가의 ‘미션: 다이아몬드’는 외계 문명이라는 거대한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경계 짓고 차별하고 착취하고 학살했던 인간의 역사와 문명을 낯선 시선으로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한국인 SF 여성 작가와 캐나다인이 지구의 친선 대표로 온코아 행성의 사절단으로 파견돼 외계문명과 만난다는 설정의 작품으로 그들은 온코아 행성과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다음의 설문에 답하게 된다. “다른 문명이 당신의 접근이나 진입을 거부하거나 자신들의 영토를 떠나라고 명령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다른 문명을 침략하거나 지배하거나 멸망시킨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다른 인종을 학살하거나 노예 혹은 식민지로 삼거나 착취한 적이 있습니까? 혹은 그러한 행위를 도운 적이 있습니까?”

정보라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캐나다 비자 신청 설문 페이지를 찾아 질문들을 들여다보다가 이 같은 질문에 착안하게 됐다고 말한다. “비자 설문의 질문들은 잘 모르는 사람이 언뜻 보기에도 범죄자나 위험인물을 가려내기 위한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만약에 개인이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차원에서 새로운 문화와 교류할 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수록된 작품들은 각 작가의 개성만큼 다채롭지만, 관성적이고 당위적이었던 경계들을 낯설게 보게 하고 거친 분류로 누락돼 있던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여운을 남긴다. 작품들 외에 작가들이 작품을 쓴 소회를 밝힌 ‘작가의 말’도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며 책의 취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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