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중국과의 수교가 시작될 때 소설가 박범신 선배님은 일찍이 연변지역을 방문했다. 그이는 거리의 상점 간판들이 저마다 한글 이름을 달고 있는 걸 보고 놀랐다. 서울 시내의 간판들이 뜻 모를 영어로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던 작가가 중국 땅에서 우리말과 글이 오롯이 살아 있는 현장을 만난 것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따라 1952년부터 부여된 행정적인 공식 용어다. 19세기 후반부터 새로운 땅을 일구기 위해 두만강을 건넌 조선 사람들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땅으로 넘어가 정착한 사람들이 연변 일대를 일구었다. 청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했던 만주족은 오늘날 그들의 언어와 정체성을 모조리 상실하고 한족에 동화됐다. 하지만 조선족은 고유의 언어와 생활 풍습을 빼앗기지 않고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박범신 선배님의 눈에 들어와 박힌 간판 중의 하나가 ‘첫날 이불’이었다. 이 가게는 놀랍게도 혼수품을 파는 이불 가게였다. 이 가게 이름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혼절해서 정신을 놓칠 것만 같았다. 첫날이란 도대체 무슨 날인가. 첫날과 이불이라는 말이 합해지면서 만들어내는 몽롱하고 신비한 분위기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첫날은 아마 신혼부부가 설레며 맞이하는 맨 처음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서로의 몸을 최초로 허락하는 첫날, 기대와 열망 끝에 다다른 교합과 교접의 첫 순간. ‘첫날 이불’이라는 범상치 않은 간판 이름 하나가 불러일으키는 말의 힘은 이렇듯 어떤 신성함에 닿아 있다. 마마스 패브릭, 이불라인, 아토앤알로, 아나이스, 코튼스케치….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본 대한민국의 이불 가게 이름은 도저히 이 ‘첫날 이불’에 미치지 못한다.
첫날은 대체로 어색하게 온다. 익숙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무살,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수업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교수님은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에 왜 국문과에 왔는지도 말해보라고 했다. 국문학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고, 문예 사조와 문학작품에 대한 비평적인 안목을 키우고 싶다고 꽤 심각하게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점수가 모자라 지방대학에 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모두를 물속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나는 엉거주춤 앞으로 나가 딱 두마디만 내뱉고 자리로 돌아왔다.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시인이 되기 위해 왔습니다. 강의실은 아무런 반응 없이 고요했고, 내 얼굴은 화끈거렸다. 나는 첫날부터 이가 잘 맞지 않는 기계처럼 삐걱거렸다.
첫날은 원래 미적지근하거나 어리숙하거나 서투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첫날은 화끈하지 않다. 누구나 첫날 앞에서는 초보이기 때문이다. 실수와 불안정과 미성숙은 첫날을 구성하는 중요한 속성이다. 첫날을 맞이할 때는 번지르르한 언사를 준비할 필요도 없고 능숙한 몸짓을 동원할 필요도 없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첫날을 맞이하면 된다. 나는 지나치게 세련된 멋을 추구하거나 완전한 우주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부류의 사람은 첫날로부터 멀찍이 달아나거나 첫날을 잊어버리거나 지워버린 사람이다.
첫날의 기억을 까먹으면서 우리는 늙어간. 첫날에 했던 약속을 종잇장처럼 구기면서 초췌해지고, 첫날의 두근거리던 심장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병을 얻게 된다. 다시는 첫날이 오지 않을 거라고 포기하고 절망하는 순간 문득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니 첫날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지지 말 일이다. 그 서툴고 철없고 민망한 시간을 되찾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첫날을 깡그리 잊어먹지는 말자. 첫날처럼 살자. 첫날처럼 만나고 첫날처럼 밥을 먹자. 첫날처럼 말을 건네고 첫날처럼 손을 잡고 첫날처럼 이불을 덮자. 첫날처럼 밭으로 나가고 첫날처럼 웃자.

안도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