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 잃은 마무리, 누가 노인을 대변할 것인가

2026-01-01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지음 |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 366쪽 | 1만8000원

디디에 에리봉(73)은 원래 미셸 푸코 평전으로 유명했던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다. 지금은 <랭스로 되돌아가다>로 더 유명한 작가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프랑스 북부 공업도시 랭스를 떠나 파리의 지식인 사회에 자리를 잡은 에리봉이 ‘노동계급 출신 게이 지식인’이라는 자신의 성적·계급적 정체성을 예리하게 해부한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2009년 출간 후 연극으로도 만들어졌을 만큼 프랑스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어판(2023)에도 호평이 쏟아지며 에리봉의 이름을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에게 각인시켰는데,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은 그가 2017년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뒤 쓴 책이다.

바닥에 쓰러져 혼자 힘으로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자 어머니는 저자의 고향 랭스에서 북쪽으로 30㎞ 떨어진 요양원으로 보내진다. 저자는 가족의 힘만으로는 돌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내린 최선의 결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상태가 악화해 7주 만에 사망한다. 이 급작스러운 죽음은 저자를 어머니의 삶과 노년과 죽음에 대한 성찰로 이끈다.

거동 능력이 빠르게 쇠퇴하는 노인에게 요양원은 임시적인 거처가 아니라 영구적인 종착지다. 비상시에 달려올 의사와 간호사가 상주한다는 것은 장점이다. 그러나 요양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그동안 맺어왔던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은 오랜 감정적 유대가 최종적으로 끊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개인이 어떤 긍정적·정서적 관계도 맺은 적 없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 노인들이 겪는 자율성의 침해도 중대한 건강상의 위험 요인이다. 재정 빈곤에 시달리는 요양원은 늘 인력이 부족하고, 인력 부족은 돌봄을 필요로 하는 노인들에게서 원하는 때 원하는 곳으로 움직일 자유를 박탈한다.

‘랭스로 돌아가다’의 저자

노동자 계급 어머니의 죽음 후 집필

계급·젠더·공공의료 등 다룬 사회적 전기

인간관계 단절되고 자율성은 사라지는

‘생의 종착지’ 요양원에서의 끝에 질문

“그들에 관해 말하고 보이게 해야”

자기 집에서 뿌리 뽑혀 강제로 낯선 관계에 편입되는 충격과 자율성의 박탈이라는 절망감은 몸보다 먼저 정신을 무너뜨린다. “어머니는 자신의 것이었던 이 쇠약해진 삶을 버티지 못했다. 뭐 하러 지속하겠는가? 그저 연명하려고? 장차 일어설 수도, 걸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이 혼자 방 안에서 침대에 꼼짝 못한 채 누운 수인이 될 텐데도?” 저자는 어머니가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했다”고 해석한다.

저자는 노동자 계급 부모의 동성애 혐오와 문화적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무 살 무렵 파리로 ‘탈출’했지만, 그토록 절연하고 싶어 했던 정체성의 일부가 어머니라는 매개를 통해 여전히 자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한다. 어머니는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유일무이한 역사가이자 ‘나’를 가족이라는 관계망 안에 고정시켜주는 좌표 같은 존재다. 몇년 전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이번에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저자는 ‘아들’이라는 역할을 영원히 상실했다. “난 할 수 있는 한 머릿속에서 가족을 지우며 과거를 없애는 데 열중했다. 그것은 (중략) 내가 어머니를 돌봐야만 했던 가족적 의무의 힘에 의해 되돌아왔다. 내 젊은 시절의 기록 보관자이자 역사가는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다.” 어머니를 파리로 모시지 않은 데 대한 후회, “금방 다시 올게요”라고 말한 뒤 찾아가지 못한 회한, 망가져가는 프랑스 공공의료에 대한 분노가 책 여기저기서 솟구친다.

저자는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어머니의 ‘사회적 초상’을 그린다.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나. 사생아로 태어나 부모에게 버림받고 열네 살 때부터 남의 집 하녀로 살다가 공장 노동자인 남편을 만났고, 그 자신도 평생을 공장에서 일했다. 젊을 때는 마트에서 삼류 소설을 사서 읽기도 했지만 죽을 때까지 즐겼던 취미는 TV 시청이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폭력이 두려워 이혼하지 못했고, 80대에 만난 유부남 연인과의 연애는 요양원에 들어오기 전 끝났다. 집을 떠난 40년 동안 자신만의 지적 세계에서 살았던 저자가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다.

강렬한 인정 욕구와 명석한 두뇌 탓에 자신이 타고난 계급적 정체성과 불화했던 지식인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여느 지식인들의 자전적 에세이와 구분되는 이 책의 미덕은 극도의 냉철함이다. 저자는 감상에 빠질 수 있는 대목에서조차 가차 없는 비판적 해부의 칼날을 휘두른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어머니는 인종주의자 노인이었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민중계급에 인종주의와 동성애 혐오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계급들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민중계급에 그런 것이 있다는 말일 뿐이다.”

저자는 타고난 계급과 획득한 계급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역설을 숨기지 않는다. “공장에서 노동한 사람은 어머니고, 노동운동의 역사와 조합주의 이론에 흥미를 가진 사람은 나였다. (중략) 노동자였기에 그녀는 ‘헛소리들’(삼류 소설)을 읽었고, 노동자가 아니었기에 난 마르크스와 사르트르, 부르디외를 읽었다.”

청년 시절 저자를 지탱해주었던 실존주의 철학도 비판 대상이 된다. 실존주의는 “우리의 한계를 해체하거나 파괴하라고 요구”하지만, 이는 “더 이상 ‘열린 미래’도, ‘열린 미래’의 가능성도 없는” 노인들을 배제해야만 성립하는 주장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누가 노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것인가’라는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자율성을 상실하고 요양원에 고립된 노인들은 스스로 말할 수 없다. 노인들의 ‘당사자 운동’은 불가능하다. “그들에 관해서, 그들을 위해서 말하고 그들을 보이게 하는 것이 작가에게, 예술가에게, 지식인에게 돌아오는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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