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김천에서 샤인머스캣 농사를 짓는 김인석(56)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한때 샤인머스캣은 시장에 내놓기만 해도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효자 상품'이었지만, 지금은 수요가 크게 줄어 수확철에도 즐겁지가 않다.
김씨는 “샤인머스캣 농사를 지으면 수입이 쏠쏠하다는 소문에 지난 10여년간 너도나도 농사에 뛰어들었고, 몇 년 전부터는 남들보다 먼저 상품을 내놓겠다며 당도가 충분하지 않은데도 수확해 판매하는 일이 반복됐다”며 “소비자들의 실망이 쌓이면서 결국 샤인머스캣을 외면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한숨을 쉬었다.
국내 포도 시장에서 샤인머스캣이 본격적으로 비중을 높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부터다. 이전까지는 한국인은 포도 하면 캠벨얼리 품종을 떠올렸지만, 저장성이 높고 고소득 작물인 샤인머스캣이 그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특히 껍질과 씨를 분리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고 맛도 달콤해 비싼 가격임에도 인기가 높았다.
포도 재배 면적과 생산량, 수출량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국내 대표 포도 산지인 경북에서도 샤인머스캣 인기가 10년 넘게 이어졌다. 현재 경북 포도밭 면적 중 59%(4829㏊)와 수출 품종의 90%가 샤인머스캣에 집중돼 있을 정도다. 이렇게 한 품종이 포도 시장을 독점하는 상황에는 특정 시기에 해당 품종 출하량이 쏟아지면 가격 하락, 품질 저하 등 문제가 발생한다.

경상북도농업기술원은 샤인머스캣으로 편중된 포도 산업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국내 신품종 육성을 통한 산업 다변화를 추진하고 나섰다. 소비 트렌드에 맞춰 다양한 과피 색상과 맛, 향, 식감, 수확 시기를 가진 품종을 개발, 농업인과 소비자 모두의 선택 폭을 넓이기 위해서다.
10여년 걸쳐 8개 포도 신품종 개발
경북농업기술원이 지난 10여년간 개발한 포도 품종은 총 8가지다. ▶빅데라 ▶골드스위트 ▶루비스위트 ▶코코씨들리스 ▶레드클라렛 ▶캔디클라렛 ▶해피그린 ▶글로리스타 등이다. 이 중 진한 붉은색과 풍부한 과즙을 가진 레드클라렛, 22브릭스의 고당도에 씨 없이 먹을 수 있어 샤인머스캣을 대체 가능한 골드스위트, 거봉처럼 큰 대과립에 청량한 식감이 특징인 글로리스타가 특히 주목 받고 있다.

새로운 포도 품종을 길러내는 데는 10~2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수확량 증가, 특정 병해충 저항성 강화, 수확 시기 설정 등 어떤 요소에 초점을 맞춰 육종을 할 것인지 목표를 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목표 설정 후엔 최대한 다양한 변이를 만들어가면서 딱 맞는 특성을 가진 품종을 선발한다. 우수 품종을 선발한 뒤에는 현장 실증 재배를 통해 기후와 토양, 병해충, 유통 등 다양한 변수를 적용해 문제점을 찾아내고 개선하는 과정을 거친다.
샤인머스캣에 편중돼 있는 포도 시장을 다양화하기 위해 품종 개발 대신 외국산 신품종을 도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해외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묘목 가격이 비싸지고 이는 농가의 부담으로 이어진다.
포도 신품종 개발에는 수출도 염두에 둬야 했다. 포도 수출이 많이 이뤄지고 있는 동남아의 경우 붉은색이 행운과 부를 상징하기 때문에 적색 품종인 레드클라렛과 글로리스타를 수출 주력 품종으로 육성했다. 오랜 운송 기간을 견딜 수 있는 저장성도 신경썼다.
붉은색 선호 동남아 맞춰 과피 붉게
이런 노력에 힘입어 경북농업기술원은 2023년 레드클라렛 품종 첫 수출을 시작으로 4개 품종을 홍콩,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국 등 7개 국가에 수출하고 있다. 현지에서 호평을 받으며 지난해 수출량은 2.5t에서 7.5t으로 전년 대비 3배 증가했다.

국내 시장 확대를 위해 수도권 소비자들의 입맛도 공략했다. 경북농업기술원은 최근 현대백화점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이달 14~17일 현대백화점 판교점과 목동점에서 ‘진짜 프리미엄 경북 포도, 서울에서 만나다’ 행사를 개최했다.
경북농업기술원은 앞으로 현재 150㏊인 신품종 재배 면적을 2030년까지 500㏊로 확대해 품종 다양화와 유통 확대를 위한 재배 기반을 구축해 나갈 계획이다. 이와 함께 품종별 재배기술 매뉴얼 보급, 현장 맞춤형 컨설팅도 지원하기로 했다.
조영숙 경북농업기술원장은 “경북에서 육성한 포도 신품종은 포도산업 구조를 바꾸고 농가소득과 경쟁력을 높이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며 “기술력과 품종 경쟁력을 기반으로 국내외 포도 시장의 판을 바꾸는 프리미엄 포도 브랜드로 도약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