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잔] 붉은 여우

2025-04-18

3년 전 추운 겨울 을지로의 전시장에서 이 여우를 처음 만났다. 정확하게는 권도연이 촬영한 여우 사진이지만, 여우를 봤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여우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인류멸망의 두려움을 동반한 팬데믹 끝에 서울 한복판에서 여우를 마주하는 일은 낯설었다. 그 뒤로 종종 이 사진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꾸 신경이 쓰이는 이유에 대해서.

한반도 전역에 서식하던 1급 멸종 위기 야생동물을 방사해 키우기 시작했다는 기사에 등장한 그 토종 여우의 현현이라니. 그러나 권도연의 여우 사진에서는 뉴스가 강조한 희소성이나 생태사진의 극적인 요소가 없다. 그 평범함이 오히려 여우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주변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뭇 생명으로서의 ‘여기 있음’, 실존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사진 매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사진의 쓸모’에 해당하기도 한다.

종이나 책처럼 소소한 사물들을 활용해 시각적 유희와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던 권도연이 처음 생명체를 찍기 시작한 건 산책 삼아 드나들던 북한산이었다. 재건축 과정에서 버려진 채 산으로 흘러들어와 들개처럼 살아가는 유기견들을 만난 뒤였다. 그때만 해도 이 작업은 도시와 자연과 생태의 관계를 조망한 다소 사회문화적 작업으로 생각되었다. 그런 그가 아예 전국의 야생 동물의 서식지 지도를 펼치고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개체 수의 이상 번식이나 먹이 고갈 때문에 도심까지 출몰하는 일부 종을 제외한다면 외진 곳, 어둑한 시간대에 운이 좋아야 만날 수 있는 이 동물들을 찾아 나서는 여정은 고행이었다. 끊긴 길을 걷고 오르내리며,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수행의 시간. 그것은 권도연이 만난 사진 속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겪는 수고로움과도 일치한다. 권도연의 이 대장정은 추적되던 사진 속 여우의 사망 후, 여우가 오간 소백산에서 부산까지의 400㎞의 경로를 따라 걷는 것에서 끝이 난다. 호기심이 많아 산에서 바다까지를 오간 여우가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하는 작가 질문은 눈 덮인 숲과 찬란한 밤하늘과 시릴 만큼 파란 바다 사진으로 끝을 맺는다. 여우에게 홀리듯, 이 장면들에 홀린다.

송수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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