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택시 기사 아저씨 말에 따르면 최근에 팔당댐 상류 경치 좋은 곳에 카페와 러브호텔이 많이 들어섰다고 한다. 분위기를 살리기 위하여 이국풍으로 화려하게 실내장식을 하고, 벽에는 원적외선이 나온다는 황토를 바른 집도 있다. 자연미를 살리기 위하여 통나무로 집을 짓기도 하고, 온갖 기화요초를 가져다가 정원을 꾸민다. 이러한 찻집 겸 음식점이 낮에는 온통 아줌마들로 꽉 찬다고 한다.
아침에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남편 직장가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다. 그래서 유한마담들은 동창끼리, 친구끼리, 교회의 집사님들끼리, 같은 계꾼끼리 몰려다닌다. “누구에게 들었는데, 어디가 분위기가 이색적이고 음식이 맛있다더라. 이번에는 거기 한번 가 보자”라는 식으로 전화하며 몰려다닌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한낮의 고급 음식점에 여자들이 꽉 차 있는데, 유일하게 청일점(靑一點)이 있단다. 그게 누구냐면, 교회의 목사님이라고 한다. 낮시간의 교회 모임에는 모두 여자들이 나올 테니까, 말이 된다. 아, 목사님은 좋겠네요. 맨날 예쁜 아줌마들 사이에 끼어 분위기 좋고 경치 좋은 음식점에서 식사를 즐기니까.
(이 시절은 외환위기-IMF 전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렇게 흥청망청 쓴 돈이 모두 외국 빚이었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져 우리는 이제 분수를 알게 되었다.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했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낀 것이 아니었다. 통계 자료를 보니, YS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에 팔당댐 상류의 경치 좋은 강가에는 모두 2,300개의 카페와 음식점과 러브호텔이 있었는데, 임기 말인 1997년에는 7,000개로 늘어났다고 한다. 1994년에 이른바 준농림지역의 건축 제한을 완화한 결과 음식점과 숙박시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기사 아저씨의 재미있는 세상 이야기를 듣다가 보스 앞에서 택시를 내리니 시간은 8시 15분. 웨이터의 안내로 룸에 들어가서 미스 최를 불러 달라고 말했다. 조금 있다가 미스 최가 가슴이 푹 파인 블라우스와 초미니를 입고 나타났다. 그동안 커피숍에서 만날 때에는 저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나타나지는 않았는데. 눈 둘 데가 마땅치 않다.
“오늘 보니 너 야하다.”
“여기 오면 옷을 갈아입어요 오빠. 이건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닌데... 그런데 오빠 왜 오늘은 예쁘다는 말을 안 하세요? 오빠 주특기가 여자만 보면 ‘예쁘다’라고 말하는 것이잖아요.”
“그래, 자세히 보니 너 참 예쁘다. 내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너에게 청혼했을 것을.”
“정말이에요? 그런 이야기는 오빠에게서 처음 듣는 기분 좋은 거짓말이네요. 그런데, 오빠, 저녁은 드셨어요?”
“찹쌀떡으로 간단히 때웠지. 예쁜 너를 보고 싶어 달려오는데 그까짓 밥이 중요하냐?”
“오빠, 여기서 식사를 시킬 수 있어요. 볶음밥이나 국수 중에서 주문하면 돼요.”
“그래? 그러면 볶음밥을 먹지. 너도 저녁 안 먹었을 텐데, 같이 먹자.”
“저는 괜찮아요, 오빠. 저는 가게 끝나고서 먹으니까요.”
식사를 하면서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어보았다. 미스 최는 오랫동안 살던 연립주택이 방이 안 나가서 이사를 못 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오늘의 운세’ 쥐띠 난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결국 오후에 복덕방에서 전화가 오고 마침내 집 계약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오빠와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 전화했다는 것이다. 이사는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양재동의 방 2칸짜리 연립을 1억 원에 사서 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가씨는 모처럼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가씨의 고향은 전남 승주군(지금은 순천시와 통합되었다)이지만 일찍이 부모님이 서울로 이사를 와서, 초등학교부터 서울에서 다녔다. 고등학교 때까지 말괄량이로 자랐고 공부도 괜찮게 해서 자기는 대학을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드물게 보는 완고한 옛날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계집애가 대학은 무슨 대학이냐고 반대해서 결국 대학을 가지 못하고 회사에 다녔다. 회사에 다니면서 방통대 국문과에 등록하고 공부하다가 중간에 회사와 방통대를 그만두었단다. 그 뒤 친구 소개로 술집에 나와 돈을 벌기 시작하였단다. 어떻게 해서 술집에 처음 나오게 되었는지에 관한 부분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뭔가 말하고 싶지 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가정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사업한다고 부산에 가셨다가 거기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 바람을 피우고, 어머니 속을 썩였단다. 그러다가 2년 전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하루 만에 돌아가시고 신림동에 있는 절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어렵게 살면서 고생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어머니를 무척 따랐는데, 지금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한다.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정신분열증이 있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얘기도 했다. 요즘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자기가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를 받고 약을 타다가 먹는다고 한다. 자기는 남동생을 끔찍이 사랑하며 죽을 때까지 돌볼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금방 새장가를 들어 신림동에서 살고 계시는데, 요즘도 2주일에 한 번 정도 찾아가서 때로는 자고 오기도 한단다. 그러나 아버지와는 감정적으로 별로 좋은 관계는 아니라고 말했다. 새엄마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
그동안 억척스럽게 돈을 모으고 은행 융자를 받아서 집을 사게 되어 기분이 좋단다. 동생과 함께 살면서 이제는 이사 다닐 필요가 없으니까. 방 한 칸은 동생이 쓰고 자기가 한 칸을 쓰겠다고 했다. 사실 잠실 집은 방이 한 칸이어서 오빠를 집에 초대하려고 해도 동생이 있어서 곤란했는데 이제 이사 가면 한 번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가벼운 식사를 끝내고 정식으로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계속되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순탄치 않은 운명 속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 아가씨이다. 술집에 나온 지 3년 만에 집을 산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과 인내가 필요하다. 술집에 있는 아가씨들이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돈을 벌 수 있는데, 실제로 그렇지 못한 것은 돈을 알뜰히 모으지 않고 쉽게 쓰기 때문이란다. 돈을 벌어서 화장품과 옷치장에 소비하고 나면 저축할 돈이 없게 된다. 그리고 남자친구라도 사귀게 되면 빈대처럼 여자에게 달라붙어 뜯어 먹으려는 놈들이 많다고 했다.
처음에는 아가씨가 세피아 차가 있다고 해서 소비를 절제하지 못하는 헤픈 여자로 생각했는데 오늘 듣고 보니 그게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동생과 버스 갈아타면서 병원에 갔다 오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단다. 그래서 작년에 동생 때문에 무리를 하여 월부로 차를 샀다고 했다. 평소에는 차를 쓰지 않고 출근은 지하철로 하고 퇴근은 택시를 이용한다고 한다. 아가씨 이야기를 듣고서 아가씨를 다시 바라보았다. 미스 최는 험한 인생을 헤쳐 나가는 당찬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집도 장만했고 나이도 찼으니, 시집을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슬그머니 물으니 “시집가는 것은 양심에 어긋나서 못 하겠다”라는 대답이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몇 번 점을 보았는데 자기는 일찍 시집가면 좋지 않다는 점괘가 여러 곳에서 나왔단다. 그래서 “시집 못 가는 것도 운명인가 보다.”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자기도 좋은 남자를 만나 시집을 가서 아기도 낳고 알콩달콩 사는 그런 날이 오지 않겠느냐고 담담히 이야기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