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저번에 펄 벅 여사의 《살아 있는 갈대(Living Reed)》에 나오는 주인공 일한의 아버지를 얼핏 엿 보았다. 펄 벅은 제 나라 전통을 사랑하고 긍지를 깊히 품고 사는, 완고해 보이는 조선 선비를 잘 그려내고 있다. 조금 더 그 선비를 구경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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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의 집안은 안동김씨 명문가다. 중전마마는 일한을 가끔 불러 대화를 나눈다. 일한과 중전은 이성으로서 끌림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한은 중전이 부르지 않아도 중전을 찾아간다. 일한의 아내는 질투에 시달리기도 한다. 어느 맑은 날 일한이 중전을 만나고 나오자, 대궐 문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일한은 대궐에서 가까운 성안에서 살고, 부친은 대대로 살아온 성 밖의 시골집에서 살고 있다. 아버지는 가정사에 무심하지만 그렇다고 여색이나 도박에 빠지는 일은 없다. 그러나 친구 없이는 못 산다.
아버지 집에 친구들이 모이면 으레 같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항상 처음 하는 이야기인 양 흐뭇해한다. 그들은 “옛날의 영광을 회상하거나 조국의 영웅에 관한 일화를 이야기하거나, 일본의 불교가 조선을 통해서 건너가 개화했다는 것을 논하거나, 일본의 여러 가지 기념비적인 예술품과 문화재는 조선에서 훔쳐 간 것이라는 이야기를 되풀이하였다. 나라(奈良)에 있는 얼굴이 길고 아름다운 관음상은 조선에서 조각한 것이 아닌가!”
이런 이야기가 무르익으면 으레 그들의 입에서는 시가 나오기 마련이다. 일한은 그런 모습이 싫다. 허구한 날 옛이야기에 빠져 지내시니… 아버지에 대해 불평하는 남편에게 아내가 말한다.
“그렇지 않지요. 과거의 영화를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우리 겨레가 얼마나 훌륭하였는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손주들을 보고 싶어 하는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간다. 손주들과 유모가 야단법석이다. 그 모습에 아버지는 “참 이상하지, 여자와 어린이가 있는 데서는 어디서나 소동이 일어나니 말이다. 그들이 있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단 말이야.”
이렇게 말한 다음 아버지는 중요한 문제로 화제를 돌린다.
“… 우리가 왜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어야 한단 말이냐? 나는 상감께 대원군의 정책이 옳다고 진언하였다. 우리는 세계로부터 고립하여야 한다. 우리는 계속 은둔국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독립은 물론, 나라 자체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찬란한 역사는 망각의 바다에 빠질 것이고,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아버지의 음성은 마치 시를 읊조리는 듯한 어조이다. 아들은 그것도 싫다. 아버지는 종종 상감의 부름을 받고 일한은 종종 중전의 부름을 받는다. 중전은 여자이고 상감과 대원군은 남자이니, 남자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아버지는 생각한다. 둘은 조선의 대외 개방 문제를 놓고 언쟁을 벌인다. 한 치 양보 없는 설전이 이어진다. 그 내용은 여기에 옮기지 않는다. 다만 그 말미는 이러하다.
“그의 부친은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갓을 쓰고 부채를 접어서 흰 도포의 소매에 넣었다. 그는 가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집을 나갔다. 그는 머리를 곧추세우고 아랫입술을 쭉 내밀고는 걸었다, 일한은 아버지가 가는 것을 지켜볼 뿐, 뒤쫓아 가지는 않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나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래서 항상 시대와 불화한다.” 이런 자아도취가 흔들려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너무 시대를 앞서간 자신의 팔자를 탓하기까지 한다. 한데 일한의 아버지를 보면서 와락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나의 자식들, 손주들도 일한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 눈으로 나를 보지 않을까? 이를테면 2050년 어느 날.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