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전세 난민

2025-12-05

‘전세 난민’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있다. 서울 전세시장이 극심한 공급난에 빠지면서, 치솟는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한 세입자들이 경기도 외곽으로 밀려나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월세를 선택하는 사례가 빠르게 늘고 있다. 전세를 유지하고 싶어도 선택지가 사라지는, 구조적 압력이 본격화된 것이다. 2021년 전세대란의 악몽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2021년 전세대란 수준 재진입

공급의 숨통을 막는 규제 후폭풍

지금 전세시장을 흔드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전세 물량의 급격한 고갈이다. 부동산 플랫폼 아실에 따르면 지난 1일 기준 서울 아파트 전세 물건은 2만4884건으로, 불과 1년 만에 22%가 사라졌다. 수도권과 광역시도 예외가 아니다. 새 정부 출범 후 세 차례 이어진 부동산 대책은 전세대출을 더 조이고, 갭투자를 사실상 봉쇄했다. 정책의 취지는 분명하지만, 시장이 받아든 결과는 다르다. 전세를 내놓을 기반이 약해지면서 공급 구조가 사실상 붕괴된 것이다. 갭투자 억제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물건만 줄고 가격만 더 치솟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시장의 어려움은 지표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전세수급지수 160 돌파 지역이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지수가 100을 넘으면 ‘수요가 공급보다 많다’는 뜻이고, 150 이상이면 전세대란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KB부동산 통계에서 지난달 서울 강북 14개 구의 전세수급지수는 162.7을 기록했다. 2021년 전세대란 당시(165.2)에 근접한 수준이다. 서울 전체 지수도 158.5까지 치솟으며 위험 수위를 향해 빠르게 다가가고 있다. 전세 물건 부족이 심화되면서 지난달 말 서울 아파트 평균 전셋값은 6억3700만원으로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입주 물량도 급감하고 있다. 내년 1분기 서울의 신규 아파트 입주 물량은 약 1400가구에 그칠 전망으로, 올해 4분기의 10분의 1 수준이다. 경기도 역시 입주 물량이 35%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공급 축소와 수급 불균형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전세시장의 불안은 더 이상 단기적 변동에 그치지 않고 구조적 불안정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내년 전국 주택 전셋값 상승률을 4%로 전망했다. 단기적 매물 감소뿐 아니라 입주 가뭄, 규제로 인한 매물 잠김, 신규 전세 공급 부진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전세난이 내년에도 쉽게 해소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공급의 숨통을 막는 규제가 이어지는 한, 전세시장의 불안은 진정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이고 정교한 재점검이 시급하다.

시장에선 급진적인 정책의 부작용을 우려한다. 세계 주요 도시에서 집값을 낮추기 위해 동원된 강력한 수요 억제책(대출 규제, 세금 중과, 거래 제한)은 장기적으로 성공한 사례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되레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주거 불안만 키웠고, 현금 자산이 풍부한 계층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 결과, 부의 양극화만 깊어졌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연구실장은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높은 집값은 생산성과 경쟁력이 집중된 도시 구조의 반영일 수 있다”며 “급진적인 억제책이 아니라, 시장의 자율성을 인정하되 주거 취약계층이 도시 안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명확한 주거지원 정책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의 전세 불안은 일시적 변동이 아니라 정책 방향이 만들어낸 구조적 균열이다. 매물이 마르고 가격이 뛰는 와중에도 규제는 더해지고 있다. 공급을 막고 불안을 키우는 처방이라면 그 대가는 결국 서민과 실수요자가 가장 크게 떠안을 수밖에 없다.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시도가 오히려 지옥을 만든다”는 칼 포퍼의 경고는, 오늘의 전세시장에도 유효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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