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버 해협은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최단 루트다. 영국 도버항에서 프랑스 북부의 칼레까지 34㎞ 떨어져 있다. 여객선이 1시간 30분이면 닿는 이곳을 하루 20회 넘게 왕래한다. 2016년 6월 23일 영국 유권자들이 유럽연합(EU) 탈퇴(Brexit·브렉시트)를 선택한 뒤에도 해협은 그대로지만 영국과 EU의 관계는 냉랭해졌다.
그런데 지난해 7월 4일 영국 노동당이 14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한 뒤 EU와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변화가 생겼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뒤 시작된 관세 전쟁이 영국 경제를 강타하며, EU와의 관계 개선을 더 시급하게 진전시켜야 할 필요성도 커졌다. 그러나 영국 정치상황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영국개혁당 등 ‘반(反) 유럽’을 앞세운 정당이 득세하면서 발목을 잡고 있다.
EU는 영국의 최대 교역 파트너
검역 폐지 등 수출 확대책 필요
브렉시트 지지자 반대 거셀 듯
오는 19일 런던에서 영국과 EU 간 첫 정상회담이 열린다. 지난 7월 취임한 키어 스타머 노동당 총리는 유럽과의 관계 재설정을 추진해 연례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EU는 영국 무역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최대 교역 파트너다. 그런 만큼 EU와 브렉시트 과정서 누적된 앙금을 씻어내야 경제 재도약이 가능하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양측은 방위안보조약에 서명할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하고 기후 위기와 불법 난민의 단속과 같은 포괄적 내용의 안보에서 협력을 강화한다는 내용이다. 또 자유무역을 유지하겠다는 공약도 정상회담 성명서에 포함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세 전쟁을 벌이는 트럼프 행정부를 겨냥했다.
영국, 브렉시트 후 상품 교역량 급감
EU와의 방위안보조약은 브렉시트를 강력하게 지지한 보수당이나 영국개혁당도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 경제 성장을 최우선으로 내세운 노동당으로선 통상 관계 개선에 너무 더디다는 지적에 부담을 느껴왔다. 영국의 상품 교역량은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EU 탈퇴 과정에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2019년부터 큰 폭으로 줄었고, 지난해 말 수치는 여전히 2016년보다 10%포인트 이상 낮다. 지난 2년간 경기 침체를 겪은 독일보다도 상품 교역량이 하락해 주요 7개국(G7) 중 최저다. 최대 교역 상대인 EU로의 교역이 감소한 가운데 다른 지역에서 이를 만회하지 못한 것이다.

싱크탱크 ‘변화하는 유럽에서의 영국(UK in a Changing Europe)’에 따르면 동·식물 검역만 폐지해도 대 EU 농산물 수출이 1~2% 늘어나고 국내총생산(GDP)이 최대 0.5%포인트 증가할 것으로 추정됐다. 영국 농산물 수출의 41%가 EU 27개국으로 간다. 그런데 브렉시트 후 통관 절차가 도입돼 기업은 각종 통관 서류 작성과 검역에 대한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이를 폐지하면 그만큼 수출이 늘어난다. 또 영국은 EU의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 제도와 연계해 수출 기업의 추가 비용을 줄이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얻어내려면 영국은 EU에 무언가를 줘야 한다. 대표적인 게 어업권이다. EU 회원국은 공동수산정책에 따라 12마일 영해 안에서도 다른 회원국 어민이 조업할 수 있게 한다. 영국은 EU 탈퇴 때 체결한 무역협력협정(TCA)에 따라 내년 6월 30일까지 어장을 개방한다. 이제 영국의 어장 접근권을 두고 협상을 벌어야 하는데, 프랑스와 덴마크 등 영국 어장이 중요한 회원국은 어장 접근권과 영국의 요구를 연계한다.
그런데 영국이 동·식물 검역 폐지와 온실가스 배출권 제도 연계를 얻으려면 EU 법원의 관할권을 수용해야 한다. EU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얻는 만큼 EU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강경 브렉시트 지지자들이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요구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2년 전부터 ‘브렉시트가 잘못된 결정’이라는 유권자의 응답이 ‘그렇지 않다’는 답보다 20%포인트 넘게 유지돼왔다. 따라서 집권 노동당으로선 통상 이익을 증진하고 지정학적 불확실성에 맞서 EU와 관계를 리셋할 필요성을 유권자에게 적극 설득해야 하지만 현실정치에선 난관에 부딪쳐 있다. 브렉시트 운동의 주역인 나이절 패라지가 ‘노딜 브렉시트’를 요구하며 2018년 창당한 영국개혁당이 지난 1일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뒀고, 정당 지지도에서도 지난 2월부터 노동당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이민 동결과 EU와의 관계 개선에 반대하는 이 정당이 급부상 중이기에, 제1야당인 보수당은 영국개혁당이 빼앗아간 유권자를 붙잡느라 더 오른쪽으로 기울고 있다. 두 야당 모두 강경 브렉시트 지지자들이 포진하고 있어 EU와의 관계 개선을 브렉시트를 저버리는 배신행위라며 맹비난을 퍼붓는다. 노동당으로선 그만큼 운신의 폭이 좁다.
트럼프 집권 전 영국은 올해 최대 2%의 경제 성장률이 예상됐다. 그러나 관세 전쟁이 시작되면서 잘해야 1% 안팎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지난 8일 미국과 영국이 잠정적으로 무역 협상을 타결했지만 트럼프 발 통상 전쟁의 불확실성은 계속된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 타결 실익은 미미
타결 내용도 실익보다는 상징성이 크다. 미국은 영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율을 연간 10만대에 한해 25%에서 10%로 낮추고, 영국산 철강·알루미늄에 부과한 25%의 관세를 폐지하기로 했다. 영국은 에탄올과 소고기, 농산물 등의 시장을 미국에 개방한다. 반면 미국이 교역상대국에 부과한 10%의 상호관세는 그대로 유지된다.
관세 전쟁에서 영국이 첫 협상 타결국이 됐지만 경제적 실익은 미미하다. 영국의 대 EU 교역 비중이 미국과의 무역 비중보다 2.6배 높다. EU와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이 영국의 경제 성장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9일 사설에서 “협상 타결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경제에는 거의 영향이 없기에 경제 성장에 필요한 EU와의 관계 재설정에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요구했다.
정책은 선택의 딜레마다. 집권 노동당이 정치적 유·불리 대신 경제 성장을 선택해야 영국과 EU의 관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너무 더딘 행보를 보인다면 기회를 놓친다.
안병억 대구대·국방군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