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우선주의와 금융시장에 쌓이는 불안

2025-01-23

2016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 후보가 힐러리를 누르고 당선이 확실해질 무렵 애플의 CEO 팀 쿡은 회사 인트라넷에 서한을 올렸다. “동료 여러분, 저는 오늘 많은 분들로부터 대통령 선거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무나 다른 두 후보자가 이번 선거에서 대등한 표를 얻었습니다. 여러분이 선거에 대해 격한 감정을 품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중략) 향후의 불확실성에 대한 논의가 오늘 있었지만 다양성을 추구하는 애플의 목표에 변화가 없음을 확인시켜드립니다. (중략) 동료들이 불안감을 느낀다면 그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실 것을 권합니다. 앞으로 나아갑시다. 다 함께!”

팀 쿡은 당시 공개적으로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고, 미국 서부의 실리콘밸리는 전통적인 민주당의 텃밭이기도 했다. 팀 쿡의 서한에는 트럼프라는 문제적 인물이 백악관에 입성하는 데 따른 당혹감이 묻어나 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했던 빅테크 기업인은 온라인 지불 시스템인 ‘페이팔’을 창업한 피터 틸이 거의 유일했다.

이번 대선 때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페이팔’에서 피터 틸과 동업을 했던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진작에 트럼프 캠프에 합류했고, 오랜 기간 동안 민주당을 지지해온 신문인 워싱턴포스트의 사주이자 세계 최대 온라인 유통업체 ‘아마존’의 대주주인 제프 베이조스도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 이 밖에 거짓뉴스와 관련해 트럼프와 각을 세웠던 ‘메타 플랫폼스’의 CEO 마크 저커버그도 트럼프 진영으로 돌아섰다. 애플의 팀 쿡 역시 이번 대선에서는 트럼프에게 100만달러의 기부금을 낸 데 이어, 트럼프와 여러 차례 직접 통화를 하면서 친분을 과시하고 있다.

연준 통화정책 제대로 작동 못해

트럼프와 대척점에 서 있었던 빅테크 기업들의 태도 변화는, 일시적인 역풍으로 치부되기도 했던 ‘트럼프 현상’이 미국에서 확실한 주류 질서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보호무역주의도 더 이상 주변부 정책으로 폄하하기 어렵다.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은 좋은 거래를 이끌어내기 위한 협상카드라기보다는 강력한 자기확신하에 진행되는 정책으로 봐야 할 듯하다.

일반적으로 보호무역이 초래할 비용으로 소비자들의 후생 악화가 거론되곤 한다. 관세 부과 등으로 수입품 가격이 높아지면 소비자들의 부담이 커진다. 이에 대해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지냈던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는 말했다. “더 이상 미국인이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 살아선 안 된다”고. 일자리를 아웃소싱함으로써 지역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저렴하게 소비해서 얻는 이득보다 일자리가 없어지는 데 따른 비용이 더 크다는 인식인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는 값싼 수입품을 들여오는 유통자본과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가 배치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부통령이 된 제임스 밴스 역시 쇠락한 공업지역에 사는 백인 하층 노동자들을 지칭하는 ‘힐빌리’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를 썼다. 이 책은 제조업의 쇠퇴가 단지 경제적 이슈를 넘어 인간 존엄을 해치는 결과로 귀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정부는 보호무역이 물가를 자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미국이 정상화된 국가로 가는 과정에서 치러야 할 비용으로 생각하고 있다. 자유무역의 잣대로 평가하면 트럼프 행정부는 확신범이라 불려도 무방하다.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이미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으로 대체됐고, 한·미 FTA에 대해서도 재협상이 이뤄진 바 있다. 특히 USMCA가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발효됐음에도 캐나다와 멕시코는 이번 미국 신정부 관세율 인상 공세의 타깃이 되고 있다. USMCA와 같은 다자간 협상이 외국 기업들이 미국 경제에 우회해 침투하는 창구가 되고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금리 상승은 증시에 부정적 영향

흥미롭게도 트럼프 행정부는 FTA 안에 들어가곤 하는 투자자·국가 간 소송 제도(ISDS)에도 반대하고 있다. 통상 ISDS는 다국적 기업이 국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많다. 2007년 한·미 FTA의 국회 비준 과정에서도 ISDS가 미국 자본이 한국 정부를 공격하는 무기로 활용될 수 있어 한국에 독소조항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의견이 많았다. 실제로 외환은행 인수에 참여했던 미국 사모펀드 론스타는 ISDS를 활용해 한국 정부로부터 총 4500억원에 달하는 배상 판결을 이끌어냈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원칙적으로 ISDS에 반대하고 있다. ISDS가 미국 자본의 해외 유출을 불러오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거 NAFTA가 발효된 이후 미국의 자동차 업체들은 멕시코로 공장을 이전했다. 인건비가 싼 멕시코에서 자동차를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하면서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이익을 늘릴 수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자들은 ISDS라는 투자자 보호장치가 있었기 때문에 재산권 보호 등이 미흡한 나라들로 미국 자본이 이탈하면서 미국 내 제조업 공동화의 한 원인이 됐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미국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자는 금융시장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인플레이션을 감내해야 할 비용으로 생각할 수는 있지만, 물가 불안이 금리 상승으로 이어지면 금융시장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당장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통화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작년 9월부터 미국은 기준금리를 1%포인트 인하(5.25~5.5%→4.25~4.5%)했지만, 오히려 시장금리는 급등(국채 10년물 3.64%→4.60%)하고 있다. 금리 상승은 장기적으로 가격부담이 큰 미국 주식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주가수익비율(PER) 26배인 미국 주식시장(1월22일, S&P500지수)이 4.6%의 장기금리를 견뎌낼 수 있을까. 보호무역주의는 트럼프 행정부의 ‘진심’이라고 생각하지만, 금융시장의 교란은 그 진심을 시험하는 첫 번째 도전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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