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판타지’는 K-문화 근원에 관한 이야기”
가로 12m 세로 5m 대형 규모
한반도 정기·역사·문화 한폭에
비경·문화유산 그림 대거 선봬
“내 스승은 국내 자연·중국 명산
글 갖춰져야 수묵화 가치 획득”
과감한 먹 운용·자유로운 화면
겉치레 없이 오직 본질에 집중
전통 수묵에서 미니멀리즘 포착
뉴욕 빌딩 사이 수묵화 선 발견/법고창신으로 독자적 화풍 구축
백두산 천지연, 한라산 백록담, 금강산의 깎아지른 봉우리에 해와 달이 휘영청 떠 있다. 우리나라 3대 명산을 배경으로 울산반구대 암각화 속 고래나 고구려 구분 벽화 속 삼족오와 수렵도, 그리고 무용도도 만난다. 화폭 하단에는 하회탈, 도자기, 기와, 불상까지 그렸다. 한반도의 지리와 역사와 문화를 수묵으로 펼쳐놓은 박대성의 야심작인 ‘코리아 판타지’다.
소산의 수묵화는 전통수묵화나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대수묵화와 결을 달리해 왔다. △과감한 먹의 운용, △자유로운 화면 구성 △실경 너머 본질에 대한 집중 등은 그의 수묵화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이며, 이런 그의 독자적인 행보는 그의 수묵화를 소산 수묵화라는 브랜드로 굳어지는 배경이 되고 있다.
소산 수묵화의 대표작인 ‘코리아 판타지’에서 소산 수묵화의 절정을 구가한다. 가로 12m, 세로 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 한반도의 정기와 역사와 문화를 한 화면에 정리한 기개, 수묵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자유분방한 구성 등은 ‘코리아 판타지’를 설명하는 키워드들이다.
소산이 작품 ‘코리아 판타지’에 대해 “오늘날 K-문화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근원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한류의 근원을 거슬러 가면 한국의 수려한 자연과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우수한 문화가 있다는 것을 ‘코리아 판타지’에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소산 박대성 화백의 기획전 ‘일체유심조’가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 경주솔거미술관에서 진행 중이다. 이번 전시에는 소산 수묵이라는 수묵화의 독창적인 길을 모색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을 대거 소개하고 있다. 먹과 여백의 독창적인 운용으로 우리나라 명산의 비경이나 소나무, 불국사, 도자기, 탑 등 경주에서 만나는 천년의 문화와 역사를 자신만의 미학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다.
소산은 전통 수묵화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현대성을 추가한 소산 수묵화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수묵을 기반으로 수묵화의 동시대적 접근을 시도하는 수많은 화가들 중에서 소산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그는 독자적인 화풍으로 일찍이 국내에서 거장의 반열에 들었다. 해외에서 의미있는 행보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시작됐다. 분수령이 된 것은 2021년이었다. 국학 교수들과 함께 개최한 한국미술 컨퍼런스가 진행됐는데, 그 중심에 박대성이 있었다. 이듬해에도 해외에서의 활약은 계속됐다. 독일, 카자흐스탄, 이탈리아 개인전에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2023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라크마), 하버드대 한국학센터, 다트머스대 후드미술관 등 해외 8개 기관에서의 순회전도 성공적으로 열었다. 특히 라크마(LACMA) 전시는 관람을 위한 긴 행렬을 연출했고, 전시가 두 달 연장되는 기염을 토했다.
수묵화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화가들의 과제는 ‘옛것을 본받아 새로움을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에 맞춰진다. 모두들 나름의 창작 의지와 독자적인 미학으로 법고창신에 몰두한다. 박대성은 소산 수묵화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적립하며 법고창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왔다. 국내외에서의 명성은 그의 성공을 뒷받침한다.
그가 법고창신에서 방점을 직은 것은 법고(法古)였다. 우리의 전통 속에 초월적인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란 믿음 아래 법고에 매진했다. “초월적이라는 것은 시대를 뛰어넘는 소통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을 찾으면 창신은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법고에 주목하며 전통 수묵을 탐구하며 발견한 것은 ‘미니멀리즘’이었다. “우리의 옛 건축이나 예술작품에 복잡하거나 장식적인 요소를 최소화하고 본질에 집중하는 태도가 배어 있었어요. 오늘날의 미니멀리즘이었지요.”
전통 수묵의 미니멀리즘에서 현대성을 발견했지만 성공적인 창신으로 연결하기까지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전통 먹에 서양의 아크릴물감을 혼용하는 것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어떤 시도들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창신의 단초가 찾아왔다. 1994년 미국 뉴욕에서의 1년 살이 때였다. 현대미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뉴욕에서 많은 미술작품들을 감상하며 견문을 넓혀가던 중에 뉴욕의 높이 솟은 빌딩숲을 거닐 때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전통수묵화에 깃든 미니멀리즘의 재발견이었다.
세계적인 마천루가 밀집한 뉴욕의 빌딩숲을 걸으며 마치 전통 산수화 속 숲속을 걷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경험했고,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빌딩들이 직선의 행렬처럼 느껴졌다. 바로 수묵화 속 선의 재발견이었다. 그는 당시 재발견한 선에 면을 추가하는 것으로까지 생각을 넓혀갔다.
뉴욕 1년 살이로 그에게 한지와 먹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한지와 먹은 적어도 1500~2000년간 이어져오며 검증된 물성이고, 긴 세월에 걸쳐 먹과 한지에 축적된 정신성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확신 아래 법고에서 찾은 현대성을 기반으로 창신(創新)을 진행했다. 그가 뉴욕에서 전통 수묵의 현재성을 발견하고 달려간 곳은 경주였다. 경주에 산재한 사찰이나 탑, 도자기 등의 유물에서 직선이 이룬 단순함의 극치를 발견해서였다. 이후 불국사에 1년간 기거하며 불국사의 설경을 세 구간으로 나눠 그렸고, 1995년에 길이 13m의 불국설경을 발표했다.
겉치레를 걷어낸 본질을 기반으로 하는 소산 수묵화의 특징은 자유분방함이다. 먹의 명암을 극적으로 대비하거나 풍경 속에 유물을 자유롭게 배치하거나, 새가 하늘에서 아내로 내려다보거나 물고기가 물속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리거나, 풍경을 원이나 면 직선의 형태로 표현하는 등은 그의 결단력 있는 과감성을 대변한다. 그 결과 소산 수묵화는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든다.
소산 수묵화의 독자성은 특별했던 그의 삶의 산물이다. 6.25전쟁 때 부친을 여의고 그 마저 왼팔을 잃어야 했다. 설상가상 모친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불운을 겪었다. 왼팔을 잃고 조실부모하고 친척집에서 성장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평생의 과업인 그림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중학교 때 그림은 이미 그의 전부가 됐다. 외팔이라는 놀림이 싫어 중학교를 중퇴하고, 그림에만 매진했다.
“집안 어르신들이 제 그림을 보시고 ‘잘 그렸다’고 하신 칭찬에 고무되어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은 독학으로 팠다. 국내외 유명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스승으로 삼았고, 골동품 거리를 배회하며 산지식을 쌓았다. 독학 중에 최고의 스승도 만났다. 서울대 박노수 교수와 수묵화로 일가를 이룬 이영찬 화백으로부터 1년간 사사할 기회를 얻었다. 이 시기 수묵의 기초를 닦았고, “박대성만의 예술세계를 펼쳐야 한다”는 큰 가르침도 얻었다. 그는 무엇보다 “신체적 불구를 극복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그림에 매달렸다”고 했다.
20대로 접어들며 서광이 조금씩 비쳤다. 1969년부터 1978년까지 국전에서 여덟 번이나 입선했다. 1979년에는 중앙미술대전에서 수묵 담채화 ‘상림’으로 대상을 수상하며 박대성이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고 이건희 회장의 특별한 관심으로 4년간 삼성가와 전속도 했다. 당시 작가로서의 명성과 경제적인 여유도 누렸지만 작업의 동력인 치열함을 찾기 위해 꽃길인 전속을 마다했다.
그에게 가장 큰 스승은 자연이었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히말라야나 중국의 명산들을 찾았다. 송나라나 원나라 때의 수묵화를 직관하는 것에도 열심이었다. 대만 고궁박물관에서 송나라 4대 수묵화가들의 대작들을 보며 문화충격도 받았다. 견문을 넓히기 위한 노력들은 화폭에서 변화로 가시화됐다. △작품의 대형화 △전통의 직선을 현대성의 요소로 부각 △ 천지인(天地人) 사상을 조형의 기반으로 수용하는 것 등이 변화의 골자였다. 그는 원은 하늘, 땅은 사각, 인간은 삼각을 의미하는 천지인 사상을 기반으로 화면 속 대상을 원, 삼각, 사각으로 형상화했다.
수묵화는 먹과 붓의 결정체다. 먹의 운용에서 그가 중시하는 것은 조화다. 산의 기세나 폭포의 기운은 웅장하고 비범하지만 요소요소에 섬세함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조화가 운용된다. 강약의 조화는 그가 강함에 꺾이지 않고, 약세의 기운에 함락당하지 않는 비결이다. “섬세함이 있기 때문에 웅장할 수 있다는 것은 음양의 진리입니다. 조화로워야 오묘한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가 서화동체를 언급했다. 글씨와 그림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의미였다. 바로 서예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가 “수묵화가 장식성을 뛰어넘는 작품성을 획득하려면 글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정신을 근간으로 해야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 역시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정신이다. 그림 그리는 일 외에 그가 유일하게 집중하는 것은 성공공부인데, 이는 본질을 꿰뚫는 혜안을 획득하기 위한 수양의 방편이다. 전시는 6월 1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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