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하게 판세 읽은 실리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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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살아있는 기린을 보지 못했다. 몸은 사슴처럼 생겼으되 온몸에 비늘이 있고, 머리에는 뿔이 났으며 소와 같은 꼬리가 달린 동물이다.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니 산 기린을 본 사람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용과 다르게 기린은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프리카산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린이 그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존재를 지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름을 부르지 않아 잊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의미로 덮어씌우는 것이다. 두 번째가 더 완벽한 소멸법이다. ‘사대’도 의미가 달라지면서 본래 뜻을 잃은 말이다.
송·거란·금 얽힐 때 현실주의 노선
사대는 했지만 사대주의는 아냐
송 밀려나자 외교 담판 거란 섬겨
고립 우려한 송 고려 관계 못 끊어
금 들어서자 거란과 관계 단절
광해군 “고려처럼 하면 나라 보전”
맹자의 사대론, 대국 의무도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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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事大)란 큰 나라(大國)를 섬긴다(事)는 뜻이다. 지금은 강대국에 대한 굴종이며 주체성을 잃은 태도라고 비난받지만 본래 뜻은 그렇지 않았다. 사대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은 맹자였다. 그는 이웃 나라와 사귀는 도를 묻는 질문에 “인자(仁者)는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줄 알고, 지자(智者)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줄 안다”고 대답했다. 전국시대 전쟁이 그치지 않는 상황에서 큰 나라와 작은 나라들이 공존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대가 작은 나라의 일방적 의무가 아니란 사실이다. 작은 나라의 사대와 동시에 큰 나라의 사소(事小)를 언급한 데서 보듯 맹자는 대국과 소국의 쌍무적 관계임을 분명히 했다.
맹자의 사대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길게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물론이고 고려도 중국 왕조에 대한 사대를 외교의 기본으로 삼았다. 맹자를 그저 붙좇아서가 아니라 중국에 강대국이 들어서 있는 상황에서 현실적인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의 사대는 조선과 달랐다. 우선 사대할 나라를 선택하는 것부터가 달랐다. 고려 전기에는 중국에 두 개의 나라가 들어서 있었다. 10~11세기에는 남쪽의 송과 북쪽의 거란, 12세기에는 남쪽의 남송과 북쪽의 금이 대립했다. 송과 남송은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이고, 거란과 금은 오랑캐 나라였다. 송·남송에는 받아들일 만한 선진문화가 있지만, 북쪽에는 없었다. 하지만 군사력은 거란과 금이 더 강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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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송이 건국된 뒤 줄곧 송에 사대했다. 아마 송으로부터 문화를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조 때부터 국가의 기틀을 새로 만들면서 당·송을 거치며 정비된 중국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3성 6부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제도가 자리 잡았고, 태묘·사직·문묘 등은 송에서 들여온 그림을 보고 건축했을 정도다. 고려 사람들이 즐기던 차와 비단·도자기도 송에서 수입했고, 송의 독보적인 도자기 기술을 들여와 고려청자로 발전시켰다. 송이 고려를 군사적으로 위협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기울어진 친송 정책은 당연히 거란의 경계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침략을 초래했다.
담판을 통해 거란군을 돌아가게 한 서희 외교의 핵심은 사대의 대상을 송에서 거란으로 바꾼 데 있었다. 그게 쉬운 일이었을까? 조선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은 청의 사대 요구를 거부했고, 그 결과는 남한산성의 고난과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오랑캐에게 사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니, 서희라도 조선에서는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는 사대의 대상을 혈통이나 정당성이 아니라 힘의 강약을 기준으로 선택했고, 그랬기 때문에 오랑캐라고 여기던 거란에 사대할 수 있었다. 고려사람들에게 사대는 대국을 섬긴다는 뜻을 표함으로써 침략을 막기 위한 외교정책이었다. 1019년 귀주대첩으로 거란에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고려는 곧바로 거란에 사대해서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하는 길을 택했다.
거란에 사대하며 송에서는 실리
거란의 힘에 밀려 송에 대한 사대를 중단했지만, 고려 사람들은 여전히 송의 문화를 동경했다. 고려와 송의 상인들이 수도 없이 왕래했고, 고려로 오는 그들 손에는 각종 서적과 차·비단·도자기·약재가 들려 있었다. 의천은 송에 가서 불교 성지를 찾아다니며 고승들과 교학을 토론했고, 권적처럼 송에 유학해서 그 나라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도 있었다. 1080년 송에 사신으로 간 김근은 그곳 문인들과 어울리고 돌아와 두 아들의 이름을 소식(蘇軾)·소철(蘇轍) 형제의 이름자를 따서 김부식(金富軾)·김부철(金富轍)이라고 지었다. 그러나 이것은 김근의 짝사랑일 뿐 정작 소식은 고려를 싫어했다. 그는 ‘고려에서 책을 사가는 일의 이해득실을 논한 상소문’을 올렸다. 고려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며, 고려 사람들이 거란과 내통하고 송의 허실을 살피고 있으니 왕래를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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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거란에 사대하면서 송으로부터도 실리를 얻고 있었으므로 소식의 관찰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송은 소식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란에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고려와 관계마저 단절한다면 고립이 더욱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거란에 대한 사대를 축으로 하는 실리 외교가 고려의 전략 가치를 높인 결과였다. 송에서 고려의 가치는 시간이 갈수록 더 높아졌다. 신법당이 부국강병을 추진하면서 고려와 연합해서 거란을 공격하자는 이른바 ‘연려제료(聯麗制遼)’ 정책을 내놓는가 하면, 거란 사신에게만 적용되던 국신사(國信使)라는 명칭을 고려에 허용하고 고려 사신의 위치를 거란과 하국(夏國) 사이로 올려주겠다는 제의도 했다. 고려의 사대를 유도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었지만, 고려는 끝내 거절했다. 고려 사람들은 송을 좋아했다. 그러나 사대는 거란에 하는 냉정함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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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에 대한 사대를 고집했던 고려가 12세기 들어 금이 건국되고 전쟁이 일어나자 돌연 거란연호 사용을 중단했다. 전쟁 상황을 지켜보며 사대의 대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신호였다. 거란이 쇠퇴하자 송이 고려를 찾았다. 1123년 사신을 보내와 송에 사대할 것을 권했지만, 고려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고려도경』을 쓴 서긍이 바로 이 사신단의 일원이었다. 그의 임무는 고려의 군사력을 정탐하는 것이었지만 숙소 밖에 나가는 것조차 제약을 받았다. 고려는 송의 실력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1125년 거란이 금에 망하자 송이 또 사신을 보내와 이번에는 금을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고려의 답은 “귀국이 먼저 적을 제압하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힘을 보태겠다”는 것이었다. 거란·금·송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는 혼란 속에서 고려는 냉정하게 판세를 읽고 중립을 지켰다.
17세기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 후금을 세우고 명과 싸우고 있을 때 광해군은 이런 말을 했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태롭다. 이럴 때 안으로 자강(自强)하면서 밖으로 기미(羈縻,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고려가 했던 것처럼만 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보면 일에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끝내는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이것이 예언이 되었을까. 이 뒤로 15년 동안 명과 청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조선은 병자호란을 당해 나랏일을 망치고 말았다.
명·청 교체기 조선 경직된 사대 고집
사대할 나라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의 행운이었다. 조선은 전기는 명, 후기는 청에 사대하는 것 말고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외부 환경만 탓할 일은 아니다.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선택의 기회가 있었다. 바로 명·청 교체기다. 그때 조선은 경직된 친명 사대를 고집했다. 조선 건국 후 200년 넘게 명에 사대하면서 현실적인 외교정책으로서 사대의 의미를 망각한 때문일 것이다. 정책으로서의 사대가 현실과 괴리되어 이념화된 상태를 사대주의라고 하는데, 조선의 명에 대한 태도가 그랬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의 외교를 망쳤다.
지금은 옛날과 다르다. 근대 이전에는 국가 간 대소·강약의 차이가 상하 관계로 이어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국가 주권의 개념이 생긴 뒤로는 모든 주권국가가 평등하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이 체제에서는 대소·강약의 차이가 상하 관계로 연결되는 것을 결단코 거부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고려가 한 것처럼 국력 차이를 현실로 인정하면서 국익을 추구하는 냉정함을 지켜야 한다. 외교는 감정으로 할 일이 아니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