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의 디지털자산(가상자산) 주도권이 싱가포르에서 홍콩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가운데 여전히 한국의 규제 상황은 제자리걸음이라는 지적이다. 미국 주도의 규제화 흐름 속에서 설 자리를 점차 잃고 있다는 평가다.
4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국제 자금세탁방지기구(FATF)가 주도하는 글로벌 규제 흐름에 맞춰 가상자산 분야에 대한 규제를 대폭 강화했다. 2022년부터 예고된 라이선스 정책을 올 하반기부터 전격적으로 시행하면서 관련 사업을 운영하는 사업자 상당수가 예상치 못한 퇴출을 맞았다.
지난 6월 30일 싱가포르 통화청(MAS)이 도입한 라이선스 정책은 가상자산 사업자에게 디지털토큰서비스사업자(DTSP) 라이선스 취득을 100% 의무화한다. 기존에는 현지 사용자 대상 서비스에만 라이선스가 필요했으나 해외를 겨냥한 서비스와 스타트업까지 모두 적용 대상이 됐다. 라이선스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최소 25만 싱가포르달러(약 2억7000만원)의 기본 자본금을 보유해야 하며 고객 신원 확인(KYC)을 새로 진행하는 등 자금세탁방지기구(FATF)의 규칙들을 준수해야 한다.
반면 홍콩은 FATF의 압박 속에서도 보다 유연한 규제 체계를 확립해가고 있다. 홍콩 당국과 증권선물위원회 주도하에 장외거래(OTC) 등 현장 실무 규제, 투자자 보호, 거래 투명화 등에 빠르게 손을 대 기존 '회색지대'를 청산하고 있다. 싱가포르가 대형 기관 위주로 시장을 정비해 스타트업들이 밀려나는 구조였다면, 홍콩의 규제책은 진입 장벽을 점진적으로 높이는 데 치중해 규제 환경에서 비교 우위를 확실히 갖췄다는 해석이 나온다.
또 홍콩 당국은 이달 1일부터 스테이블코인 관련 조례를 시행해 직접 코인 발행 라이선스를 발급·관리한다. 이미 알리페이를 운영하는 세계 최대 핀테크 기업 앤트그룹도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에 참전했고 50개 이상의 기업이 이를 준비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미국 지니어스 법안의 영향으로 테더 등 일부 스테이블코인 발행자가 3년간의 규제 준수 유예기간을 맞닥뜨리면서 홍콩 등 중국계 신흥 스테이블코인이 성장할 결정적 기회라는 관측도 나온다.
규제 흐름에 따라 아시아 크립토 허브가 옮겨가는 상황에서도 한국의 규제 상황은 어두운 터널에 놓여 있다. 다만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해 가상자산을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상품으로 인정하고 수탁·관리 근거를 마련하는 등 꾸준히 뒤따르는 추세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국내에 남은 업체들도 두바이 진출을 비롯해 해외 기반의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며 "한국에서는 새로운 전환점마다 금융당국은 태스크포스(TF)를 신설하며 미온적인 대처에 머물고 있다. 빠져나가는 국내 업체들을 잡고 해외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제도 정비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