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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의 발명과 발전은 동시에 시계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시계는 기본적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로, 시간은 공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자동차나 비행기가 발명되면 이같은 탈 것의 속도와 도착 예상시간 등을 측정하기 위한 시계도 발전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비행기가 처음 발명된 순간에도 비행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조종사는 시계를 가지고 비행에 나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처럼 비행기 내부에서 컴퓨터로 시간과 방향, 위치를 자동으로 계산하고, 더 나아가 자동 항법으로 운항하는 세상에서 항공 시계의 중요성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하지만 창공을 가로지르는 파일럿과 그의 손목에 매여진 시계는 ‘멋과 기술’의 상징이자 오늘날에도 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다.
◆비행기의 발명과 ‘항공 시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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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비행기가 처음 발명됐을 때는 오늘날 엔진보다 출력이 훨씬 약했다. 이 때문에 비행기가 조금만 무거워도 뜰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비행기 몸체는 물론 조종석도 장비도 최소로 가지고 타야했다. 오늘날 조종석처럼 외풍을 막는 캐노피는 달수도 없었고, 제한적인 연료를 적재해야 했고, 내부에 난방 장치 역시 고려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 비행기 파일럿들은 두꺼운 외투와 장갑, 모자를 끼어입고 고공의 차가운 바람을 견딜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파일럿들이 입었던 옷들이 오늘날에는 항공점퍼 등 패션으로 재창조 되고 있다.
항공 시계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항공 손목시계는 두꺼운 점퍼 위에 착용해야 했다. 자동 항법이 없었던 터라 파일럿이 항상 조종간을 붙잡고 있어야 했고, 이 때문에 주머니나 소매 속에 있는 시계를 꺼낼 겨늘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꺼운 점퍼 위에 착용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시계줄은 일반 시계줄보다 두 배 이상으로 길었고, 시계 크기도 클 수 밖에 없었다. 과거 항공 손목시계의 크기는 40mm가 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당시 손목시계 크기가 30~34mm가 일반적인 사이즈였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큰 크기다.
또한 빠르게 숫자를 인식해야 했기에 시간을 나타내는 다이얼 상 숫자는 크게 디자인 됐고, 한 밤에 빛 한 올도 없는 하늘을 가로지르기 위해 야광 도료로 숫자를 표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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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측면 이외에 기능적으로 항공 시계는 일반적인 손목시계와 달라야 했다. 오늘날 항공기는 컴퓨터로 비행기의 속도와 방향, 자신의 위치를 자동으로 알 수 있지만, 100여년 전에는 이 모든 것을 파일럿이 최소한의 아날로그 도구로 계산해야 했다.
'데드레코닝'(Dead Reckoning)은 비행기의 방향과 속도를 계산해 자신의 위츠를 추측하면서 항해하는 개념인데, 파일럿은 손목시계와 지도를 이용해 이를 계산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파일럿이 지도를 보고 방향을 잡은 뒤 지도상 거리와 속도를 계산하고 달리다보면 중간 목적지가 나오는 개념이다. 이 때문에 항상 시계를 보고 있어야 했고, 연료 상태를 동시에 체크해야 했다. 앞서 말한 것 처럼 숫자와 크기가 크고 튼튼하고 정확한 손목시계가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오늘날 손목시계는 당시 항공 시계처럼 무작정 큰 사이즈로 사용하기 어렵다. 오늘날 손목시계는 40mm 이상의 사이즈도 유행하고 있지만, 거의 50mm에 가까운 항공 시계는 건장한 남자의 손목에서도 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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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오늘날 항공 시계 디자인으로 출시되는 대부분은 38~44mm 사이즈로 개량했다. 고급 시계 브랜드로 알려진 IWC 역시 다양한 사이즈의 파일럿 시계를 선보이지만, 무려 과거 항공 시계 사이즈와 비슷한 46.2mm의 ‘빅 파일럿’(Big Pilot) 모델도 출시하고 있다.
특히 IWC 시계를 말하면 소설 ‘어린 왕자’를 빼놓을 수 없다. 어린 왕자의 저자인 프랑스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작가 이전에 비행기 조종사였다.
생텍쥐페리는 1935년 개인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 파리에서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사이공(오늘날 호치민)까지 장거리 비행시합 도중 아프리카 리비아에 불시착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는 훗날 어린 왕자의 주요 일화로 각색돼 쓰여졌다.
아울러 IWC는 이같은 생텍쥐페리의 일화에 영감을 받아 빅 파일럿 모델에 ‘어린왕자 에디션’을 지금도 출시하고 있다.
◆독일 ‘붉은 남작’과 플리거(Flieger)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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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워치는 전 세계 시계 브랜드에서 선호하는 장르이지만, IWC를 필두로 독일 시계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오늘날 항공 산업은 미국과 프랑스 쪽으로 대부분 넘어갔지만,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비행기 강국은 다름 아닌 독일이었다.
1917년 독일은 비행기 발명국가는 아니었지만 강력한 기술력으로 비행기 개발에 뛰어들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비행기를 만들었는데, 그 비행기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주요 공중전력으로 쓰인 ‘포커 Dr.1’이다.
포커 비행기는 날개가 삼중으로 된 삼엽기로 날아다니는 면도칼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동성이 뛰어났고, 세계대전에서 큰 전과를 올리면서 파일럿 수도 늘어나게 됐다.
특히 당시 귀족들은 비행기 전투를 과거 중세시대 기사들의 기마전처럼 낭만으로 여겼고, 자신의 자산을 활용해 저마다 비행기를 이끌고 전장에 나섰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항공대 최고 에이스인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도 포커 비행기를 붉은색으로 칠하고 공식적으로 73기의 상대 비행기를 격추한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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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항공 산업이 발전할 수록 독일의 항공 시계도 급속도로 발전했다. 오늘날에도 독일에서 만들어진 항공시계를 ‘플리거’(Flieger)라고 한다. 플리거 디자인은 오늘날에도 한 눈에 알 정도로 독특한 디자인으로 자리 잡았다.
1940년대부터 플리거 디자인의 시계를 제작한 기업으로는 앞서 말한 IWC, 하이엔드 브랜드로 잘 알려진 아 랑게 운트 죄네(A. Lange & Söhne), 스토바(Stowa), 라코(Laco), 벰페(Wempe) 다섯 개다.
아 랑게 운트죄네나 IWC 등은 고가라 접근이 어렵지만, 스토바나 라코는 가성비가 매우 뛰어나 전통 파일럿 시계를 착용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좋은 선택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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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거 같이 전통적인 항공 시계가 아니라도 비행기는 수 많은 시계 브랜드와 디자인에 영감을 줬다. 오늘날에도 시계 제조사는 항공 시계 장르로 유명한 파일럿의 이름을 따거나 디자인을 재해석해 시계를 출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대서양을 착륙없이 최초로 횡단한 미국의 찰스 린드버그는 비행 당시 론진(Longines) 시계를 애용했는데, 론진은 린드버그의 이름을 딴 ‘아워앵글‘(Hour Angle)이라는 항공 시계를 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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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일본 시계기업 세이코(Seiko)도 자국의 애니메이션인 ‘붉은 돼지’를 기념한 에디션을 출시했다. 붉은 돼지가 독일 항공 에이스인 붉은 남작에서 영감을 받은 점을 감안하면 적절한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다.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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