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 보내라" 월300만원 쏜 조부…과잉양육 손주까지 대물림 [뉴 헬리콥터 부모]

2024-12-02

한 운수회사에서 일하다가 은퇴한 뒤 경기도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김명환(69·가명)씨는 둘째 딸 진경(38·가명)씨에게 매달 300만원씩 송금해준다. 진경씨 첫째 딸(4)의 영어유치원비 등 교육비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다. 출산 뒤 일을 그만둔 딸의 가정에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자처한 일이었다.

그는 2년 전 둘째 아이를 낳은 딸에게 무상으로 증여할 수 있는 최대 한도인 1억원을 현금으로 물려주기도 했다. 김씨는 “젊은이들이 성실하게 직장을 다녀도 집 한 채 사기 어려운 시대에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부모가 돈을 쥐고 있을 필요가 없다”며 “딸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진경씨는 “한편으론 부담이 되는 것 같아 미안하면서도 살림에 도움이 돼 고마운 마음도 크다”고 했다.

성인이 된 자녀 삶에 개입해 도움을 주려는 형태의 헬리콥터 양육은 손주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추세다. 조부모가 손주의 교육비 등을 대신 내주거나 재산을 물려주는 게 대표적이다.

지난 7월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는 영어유치원으로 불리는 유아 대상 영어학원의 1인당 연평균 교육비가 2093만원이라고 밝혔다. 가구주 연령이 30대 이하인 가구 연평균 소득 4123만원(통계청·2022년)의 절반에 해당하는 셈이다. 금융기관을 다니다 퇴직한 한철호(72‧가명)씨는 “첫째 손자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해 돈 쓸 곳이 많을 것 같아 아들 내외에게 필요한 데 쓰라고 아예 신용카드를 줬다”며 “매달 100만원 정도 금전적 지원을 한다”고 말했다.

국세청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조부모가 미성년 손주에게 직접 증여한 건수는 총 2만 7024건, 건당 평균 증여 액수는 1억 4000만원이었다. 정찬승 대한정신건강의학과 이사는 “부모가 성인 자녀와 손주 세대의 물적 기반을 구축해주는 것을 자신의 양육 역할로 규정한 것”이라며 “물리적으로는 세대별 가족이 분리됐지만, 심리적으로는 손주까지 부양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놓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과잉 양육의 대물림 현상이 사회적으로 양극화와 불평등을 심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중앙일보가 20~30대 자녀 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82%(41명)는 ‘미래에 자녀를 낳게 된다면 부모로부터 받았던 도움을 똑같이 제공할 의사가 있다’고 답변했다. 최진영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부모들이 최소한 자신만큼의 사회경제적 안정을 이루기를 바라는 심리적 요인에 더해 과거보다 저성장 시대가 되면서 잠재의식 속 불안이 커져 자녀가 성인이 되어도 과잉 양육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지 못하는 부모의 박탈감도 커진다. 회사에서 정리해고 당한 뒤 물류센터에서 경비업무를 하는 민창재(63‧가명)씨는 “주변에 손주한테 적금을 들어준다거나 비싼 옷을 사입히고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공유하는 친구들을 보면 ’나는 저럴 여유가 있을까’ 싶다”며 “미안할 뿐이지만 최대한 놀아주고 정서적으로 도와줘야겠다”고 말했다.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이른바 부모 찬스를 통해 그들이 가진 자원이나 지위를 자녀에게 차별적으로 보장하면서 기회의 공정이 줄어드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는 결국 계층 이동의 사다리 붕괴라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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