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대 초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의 로봇공학자이자 미국 로봇 기업 아이로봇의 공동 창업자인 헬렌 그라이너가 여준구 대동(000490)로보틱스 대표를 찾아왔다. 당시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에서 디렉터로 재직 중이던 여 대표에게 그라이너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도대체 한국은 어떻게 된 거냐. 한국에서 언제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아이로봇은 로봇 기술을 총동원해 ‘룸바’라는 이름의 로봇청소기를 출시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의 여러 회사에서 로봇청소기를 8대나 출시했기 때문이다.
■잠재력 무궁무진한 한국
2000년대 초 스타트업과 달리
자체 원천기술로 사업화 시작
첨단제품 제조 능력도 수준급
여 대표는 “아이로봇 사례처럼 시장에서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한국은 어떠한 첨단 제품이라도 금방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며 “실제 한국은 세계 5대 로봇 시장으로 로봇 밀도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등 로봇에 대한 친밀도가 높고 세계 로봇 경진 대회 1위를 차지한 경험이 있는 등 잠재력이 풍부하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 기업들이 보유한 수준 높은 로봇 기술을 기반으로 세계시장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그는 “최근 사업화를 시작한 기업들은 처음 로봇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2000년대 초반에 창업한 스타트업과 결이 다르다”며 “이전의 로봇 스타트업과 달리 최근 창업한 스타트업들은 대학에서 오랜 기간 로봇을 연구해온 우수한 교수 및 연구자들이 자체적인 원천 기술을 가지고 설립했다.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토대를 갖췄다”고 말했다.
다만 이런 우수한 기반을 ‘상용화’로 꽃피우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속적인 투자가 필수라고 강조했다. 특히 지난 20여 년간 정부 지원의 연속성 변화로 중국에 뒤처진 현실을 반복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 지원 부족에 경쟁 밀려
韓 로봇생산 점유율 3% 그쳐
부품마저도 60% 해외에 의존
여 대표는 “20년 전만 해도 중국은 로봇 기업은 물론 잘 알려진 관련 논문조차 없었던 ‘로봇 불모지’였다”며 “오히려 1980년대 대우중공업에서 ‘노바-10’이라는 산업용 로봇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기도 하는 등 한국이 로봇 분야에서 월등히 앞서 있었다”고 했다.
현재 로봇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과 뒤처진 한국 상황의 원인은 정부 투자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게 여 대표의 생각이다. 중국은 정부의 막대한 재정 지원을 기반으로 유럽 등에 있는 산업용 로봇 기업을 대거 인수하고 인재를 육성 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한국은 부족한 정부 지원에 미국·일본은 물론 중국에도 밀리는 상황이 됐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의 로봇 생산 점유율은 5%에 그친다. 산업용 로봇 수출 점유율 또한 3%를 밑돈다. 이마저도 부품의 60%를 일본 등 해외에 의존하는 등 경쟁력이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 대표 역시 “최근 우리 정부가 로봇 산업에 투자를 확대한다고 하는데 지속적으로 투자를 했다면 현재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여기에 정부가 기술 개발을 위한 지원뿐 아니라 국내 기업들이 개발한 로봇의 세계시장 진입을 위해 사용 실적(트랙 레코드)을 쌓을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미국이나 유럽의 산업로봇 시장을 보면 해외 기업들은 2~3세대 이전의 칩이 장착된 로봇을 여전히 사용하는 등 검증된 제품만 사용하고 있다”며 “아무리 뛰어난 로봇을 개발해도 검증이 없으면 진입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트랙 레코드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개발한 T-50 고등 훈련기 등을 성능이 검증되지 않았지만 공군이 10여 년간 꾸준히 구매하면서 우수한 성능을 입증해줬고, 결국 이는 FA-50 다목적 전투기의 수출로까지 이어지게 된 요인”이라며 “국가가 정책적으로 국내 로봇 기업들의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정부 사업 등에서 한국이 개발한 로봇 등을 참여시켜 성능에 대한 인증을 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잘하는 분야 선택과 집중을
韓 강점 가진 기술 기반으로
농업 등 특정산업 로봇 공략
정부사업에 참여·인증 필요
현재 기술·가격 면에서 미국과 일본은 물론 중국에도 밀린 한국이 세계 로봇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한국이 제일 잘하는 분야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조언도 했다.
여 대표는 “조선업을 보면 수주량 면에서는 중국이 많을지 모르지만 한국이 액화천연가스(LNG) 선박 등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특수선 시장을 주도하면서 글로벌 조선업을 이끌어가고 있다”며 “로봇 역시 가격경쟁력으로 나서는 것보다 높은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국이 확실한 우위를 차지한 반도체·조선·철강·석유화학 등 특정 산업 분야에서 사용되는 특수 목적 로봇으로 승부를 걸어야 세계시장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서도 고령화 등으로 인력 부족을 겪고 있는 농업 분야에 접목된 농업용 특수 로봇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여 대표는 “지난해 미국 농무부(USDA)와 NSF가 농업 로봇 분야의 기초연구를 발전시키기 위한 협력 프로그램을 시작하기로 했다”며 “오래전부터 정밀 농업 등 새로운 시장 창출을 위해 협력해온 두 기관이 다시 한번 손을 잡으면서 농업 로봇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 대표 역시 올해 대동그룹의 AI 로봇 전문 기업 대동로보틱스로 자리를 옮기며 농업용 로봇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대동이 올해 초 출시한 농업용 운반 로봇 ‘RT100’ 또한 한국로봇융합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대동과 함께 개발한 ‘작품’이다. 여 대표는 “지금까지 기술적 한계로 로봇의 발전 속도가 더뎠지만 인공지능(AI)이 들어오면서 너무나 빠르게 발전하고 있고 로봇의 영역도 넓어질 것”이라며 “농업 분야에서도 AI와 로봇의 접목으로 운반·방제 등 농업 로봇을 넘어 건설 현장 등 산업은 물론 서비스 분야까지 그 영역이 확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준구 대동로보틱스 대표는… △1958년생 △서울대 기계설계학과 학사 △오리건주립대 기계공학 석박사 △하와이주립대 기계공학과 교수 △미국 국립과학재단 프로그램 디렉터 △미국 국립과학재단 동아시아태평양 지역 디렉터 △한국항공대 총장 △한국로봇융합연구원 원장 △전기전자공학자학회(IEEE) 종신석학회원 △대동로보틱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