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잔] 색맹의 섬

2025-08-01

‘무엇을 담을까.’ 사진가에게 작업의 방향을 정하는 일은 달뜨는 설렘과 동시에 끝없는 고민을 선사한다. 그런데 벨기에 출신의 사진가 산네 드 빌데에겐 어느 날, 그 주제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유전학과 인간의 삶에 대해 작업하던 그녀가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다. 폴리네시아의 백색증 작업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한 청취자가 연락해 왔다. 완전 색맹증을 가지고 있던 그 청취자는 ‘색맹의 섬’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황스럽지만 강렬한 직감, 그렇게 그녀는 예기치 않게 ‘전달받은’ 프로젝트에 돌입하게 된다.

색맹의 섬은 태평양 한가운데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조그만 섬, 핀지랩이다. 최고의 과학 논픽션으로 꼽히는 올리버 색스의 『색맹의 섬』에서도 언급됐듯 1775년 이 섬 일대를 덮친 태풍으로 전체 인구의 90%가 사망하고 남은 생존자는 겨우 20명 남짓. 고립된 섬에서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가족이 되고, 친척이 되는 과정(근친혼)에서 완전 색맹이라는 유전적 특징이 퍼졌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단지 검정, 흰색, 그리고 회색의 음영뿐이었다. 낮의 햇살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눈부시고 달빛은 밤을 낮처럼 바꿔놓지만, 그곳에서 색은 단지 하나의 단어에 불과하다. 어두운 집에서도 형형색색 깔개를 짜고, 달빛에 반사된 물고기 비늘로 밤낚시를 즐긴다. 핀지랩에서 색맹은 질병이 아닌 조금 다를 뿐인 삶이 됐다.

섬에 딱 하나뿐인 학교의 학생들과 주민들이 근처 섬으로 소풍을 다녀오는 길. 색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 산네 드 빌데는 적외선 카메라를 선택했다. 가시광선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사진과 달리 보이지 않는 파장의 영역을 파고든 작업은 이렇듯 근사하고 몽환적인 풍경으로 이끌었다. 완전 색맹인 이들이 ‘빨간색’을 인식하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더 강하다는 그녀의 깨달음 역시 작품에 반영됐다. 연한 핑크, 짙은 마젠타, 밝은 라일락 색조가 은은하게 스민 작품들을 바라보자니 “세상은 이렇게 보여야 한다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이들의 시각적 현실에 스며들면 좋겠다” “잠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되물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던 그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석재현 사진기획자·아트스페이스 루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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