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일지] 영화 <반구대 사피엔스>, 다큐멘터리 <반구대별곡> “⑦ 기획”

2024-06-29

세계영화사까지 안 가고 한국영화사로만 국한했을 때 영화 제작에 있어 주도권의 추이를 ‘대충’ 짚어 보면, 1900년대 초창기 영화는 감독이 ‘갑’이었다. 이런 추세는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현장에서 주고받던 감독이 갑인 이유는 감독 가방끈이 가장 길기 때문이었다.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였던 내가 90년대 초 대학을 갈 때만 해도 전기, 후기, 전문대 입시를 통틀어 9.2대 1이었던가, 대략 열 명 가운데 한 명이 대학에 가던 시절이었으니, 고졸만 돼도 현장에서는 학력이 높은 편이었고, 대졸이면 묻지 말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처음 영화 현장을 나갔던 1990년대 초반에 감독과 작가가 문관(文官)쯤 된다면 기술 파트는 무관(武官)쯤 된다는 암묵적 인식이 있었고, 몸을 쓰는 기술 경시 풍조가 영화판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엔 배우를 제외한 현업 영화인 수가 2만 명도 안 됐고, 감독 수는 2010년대 초반까지 1천 명을 넘지 않았다. 코로나 시국 때 최근 몇 년간 개봉영화를 중심으로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집계한 영화인 수는 3만 명이 되지 않는다. 2013년쯤 집계한 수가 2만 3천 명이 좀 넘었고, 최근 자료에는 2만 8천여 명이 잡힌다. 0.05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는 속에 나도 포함되고 있으니 영화인이란 자긍심을 가질 만한 일 아닌가.

감독이 갑이던 시절을 학술적으로 정의하자면 영화 작업에서 분업화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인 이유가 포함된다. 전자제품 회사 ‘대우’에서 비디오덱을 판매하기 위해 비디오영화를 양산하게 되면서 영화시장이 비약적으로 커졌다. 웬만한 사업에 투자를 하면 회수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영화는 그 기간이 무척 짧다. 프리프로덕션(사전작업)이 가장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에 가장 적은 돈을 투자하고 상대적으로 가장 큰 수익 지분을 가져간다. 프로덕션(제작)은 가장 크게 투자한 뒤 가장 빠르게 회수할 수 있고, 포스트프로덕션(후반작업)은 이미 판이 다 짜였기 때문에 결과물에 따라 상대적으로 적게 투자하고 작지 않은 지분을 챙길 수 있다. 투자에 대한 열정이 큰 대한민국 국민과 세습 구조인 한국 대기업의 재벌 2, 3세대들은 폼도 나고 덜 힘들면서 더 빠르고 더 크게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영화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돈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조물주 위의 건물주처럼 감독 위에 투자자가 군림하게 되고, 투자자들은 더 꼼꼼하고 더 편리하게 돈을 관리하기 위해 적은 돈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직업군을 기업 구조와 같이 만들기 시작했다.

2000년대를 즈음해서 국내 대학은 물론 해외물 먹고 들어온 기술 스태프들이 많이 늘어났다. 현장에서 감독 기를 죽이는 촬영감독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조명팀이 촬영팀에 속하는 할리우드 방식이 보편화됐으며, 분장팀, 의상팀, 소품팀, 미술팀이 프로덕션디자인팀에 속하거나 합종연횡하며 계약에서 주도권을 가지려 했다. 일은 더욱 세밀하게 분업화되었지만 계약 주체는 뭉치는, 일종의 아메바 스타일을 추구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느 대기업은 영화를 가장 많이 본다는 여대생들을 시나리오 평가단으로 구성해 감독이 1년 또는 수년 동안 써온 시나리오를 가위질했고, 그 결과물은 대개 참담했다. 어설픈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감독이 데뷔하려면 시놉시스를 직접 써 가야 하다가, 시나리오를 요구하다가, 심지어 최근에는 스토리보드까지 만들어가야 겨우 기회를 줄까 말까 한다. 다른 이유는 다 필요 없다. 능력 있는 감독들을 대체로 혹사한 이유는 프리프로덕션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전문가도 아니고, 전공자도 아닌, 영화의 주 수요원인 여대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산고의 고통을 거쳐 써낸 시나리오에 빨간펜 칠을 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하면 참 기가 찰 노릇인데, 어쨌든 이러한 부조리를 합리적으로 안착시키는 데 일조한 이들이 극소수의 여성 제작자와 여성 감독들이었다.

1999년 한국 영화산업의 중심축이었던 영화진흥공사가 영화진흥위원회로 재창립했다. 신나게 가위질당하던 시절에서 영화가 예술로서 산업으로서 규정된 전환점이었다. 대기업 자본이 장맛비처럼 쏟아지면서 한국 영화는 산업 면에서 급팽창하기 시작했고, 영화를 예술보다 경제적 관점으로 바라보던 당시 프랑스 유학파들이 투입된 영화진흥위원회의 정책은 경제 논리 안에서 예술적 균형을 잡으려는 다양한 시도를 전개했다. 이즈음 조감독들이 조합을 결성해 그 어느 엔터테인먼트 산업보다도 빠르게 표준근로계약서를 안착시켰다. 이와 함께 ‘돈 버는 영화’의 기획과 ‘영화의 예술성’을 위한 기획의 중요성이 높아졌고, 프로듀서의 역할이 확장됐다.

감독을 중심으로 한 독립적이고 정치적이며 사회비판적인 다큐멘터리 영역에서도 최근 기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 계기는 연출력보다 기획력으로 승부를 본 다큐멘터리 <워낭소리> (2009, 이충렬)의 성공과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역사상 최대 흥행을 끌어낸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진모영)였다.

부모님에게 용돈을 추가로 얻어내기 위해 거짓말을 구상하는 것도 기획이고, 성공적인 프러포즈를 위해 이런저런 구상을 하는 것도 기획이다. 기획이 완벽하면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고, 기획이 성실하면 속임수임이 들켜도 유쾌하게 넘어가지만, 기획이 어설프면 계획이 실패할 뿐만 아니라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공산이 크다. 하물며 엄청난 인력과 시간과 돈이 투입되는 영화는 말할 것도 없다.

누군가는 내게 일을 많이 벌인다고 지적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내 기획력을 끊임없이 이용하려 하며 또 누군가는 내 기획력을 높은 가격으로 사기도 한다. 어떤 상황이라도 견적이 나오면 반드시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기회가 되고 책임질 사람들이 있으므로 일을 벌이고 반드시 성과를 낸다. 이용당하는 줄 알면서도 워커홀릭이라 대부분 그 상황을 즐긴다. 나를 신뢰하면 몇 배로 보상한다. 그렇다. 내 기획력은 대체로 인정받았고 덕분에 잘 먹었고 잘 살았다. 물론 내가 다리 뻗을 자리가 아니면 나답지 않게 방관자가 될 때도 많다.

기획력이란 타고난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거짓말이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조기교육을 많이 받았고, 책도 많이 읽었고, 글쓰기 교육도 치열하게 받았다. 2003년부터 매년 스무 살들을 만나 새로운 문화를 끊임없이 접했고, 선천적 오지랖 덕분에 매 순간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영화판에서 좋은 제작자와 감독들을 만나 인정받으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 그래서 기획력을 갈고닦을 수 있었고, 무림 고수처럼 기획의 반사신경이 발달했다.

작년 말부터 모 기관, 모 대학과 영화·영상 아카데미에 관한 논의를 지속해 왔고, 다음 주부터 지역 방송국과 협업해 전문가 과정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내가 가장 강조했던 점이 기획이었다. 기술적으로 높은 수준의 울산 지역 영상인들이 크게 관심을 보였고, 과정이 개설되자마자 반나절 만에 인원이 초과해 조기 마감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1차로 걸러낸 이들을 대상으로 원격 대면 면접을 진행했다. 몹시 뿌듯하고 기쁜 일은 신청자 대부분이 기획력 향상을 위해 이 과정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개중에는 내 작업을 함께 하고 싶은 이들도 두 명이나 있었다.

11년 동안 답답했던 날갯짓이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앞으로 울산의 영화·영상산업에 관하여 좀 더 크게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다. 한때 체념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다시 힘을 내보려 한다.

(다음 호: ⑧ 딴따라에서 신진 귀족으로)

이민정 영화인

[ⓒ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