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비사
제7부. 전두환 절대권력의 몰락
‘1986년 우리 경제가 성취한 성과에 대해 국제사회에서는 세 마리 토끼(고도성장, 물가안정, 무역흑자)를 잡았다고 평가했다. (중략) 이러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누가 대통령이었더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전두환 회고록)
1986년이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의 기록을 세운 것은 사실이다. 전두환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정치는 정반대였다. 86년은 전두환 정권 입장에서 위기의 연속이었다. 경제성장의 이면에 감춰졌던 정치적 욕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필리핀 ‘피플 파워’ 소식으로 시작된 1986년
1986년은 필리핀 피플 파워의 함성으로 시작됐다. ‘피플 파워(People Power)’ 혁명은 21년간 장기집권해 온 독재자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대통령을 축출한 민주화 운동이다. 당시 필리핀의 정황이 여러모로 한국과 비슷해 일찌감치 관심을 끌었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는 65년 대통령에 당선돼 필리핀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66년 미국의 요청에 따라 필리핀군(비전투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하는 과정에서 반전 시위가 극심했다. 마르코스는 폭력으로 진압했다. 69년 재선 직후 금융위기까지 맞아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자 72년 계엄령을 선포했다. 야당의원과 반정부 인사를 대거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학살과 암매장까지 했다(여러 면에서 마르코스는 박정희를 닮았다).
이 과정에서 마르코스의 최대 정적인 야당 정치인 아키노 2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미국이 나서 목숨을 구해줬다. 아키노는 80년 ‘병치료’를 핑계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아키노는 83년 필리핀으로 돌아왔는데 마닐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암살당했다. 조사 결과 필리핀 군 참모총장 베르 장군의 지시로 밝혀졌다. 베르는 마르코스의 측근(아키노는 김대중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미국 망명 시절 아키노는 김대중과 교류했다).
아키노 암살 이후 마르코스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더욱 확산됐고, 아키노의 미망인 코라손 여사가 재야의 리더가 됐다. 결국 마르코스는 86년 ‘재신임을 묻겠다’며 조기 대선을 시도했다. 개표 과정에서 코라손이 우세하자 개표를 중단시켰다. 마르코스는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면서 취임을 강행했다. 부정선거 항의시위가 이어지자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개혁 성향 군부 세력이 마르코스의 명령에 반발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마르코스는 충성파 정부군을 동원해 개혁 반란군을 포위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가톨릭 지도자 하이메 신 추기경이다. 필리핀은 가톨릭 국가다. 86년 2월 25일 ‘개혁 군부를 지키자’는 추기경의 호소에 시민들이 묵주와 꽃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진압군의 총구에 꽃을 달아주는 시민의 모습은 비폭력 항쟁의 상징이 됐다(신 추기경은 김수환 추기경을 닮았다).
마르코스는 미국에 SOS를 쳤다. 26일 새벽 미군 헬기가 대통령궁의 마르코스를 필리핀 내 미군 공군기지로 옮겼다. 마르코스는 그곳에서 미군 공군기를 갈아타고 괌을 거쳐 하와이에 도착했다. 마르코스는 3년 뒤 망명지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마르코스는 이승만을 닮았다).
피플 파워에 고무된 재야 운동권
당시 필리핀 민주화 시위는 국내 언론에서도 헤드라인으로 다뤄졌다. 재야 운동권이 고무된 것은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