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대, ‘정치적 목소리’ 드높인 칸 영화제···가자지구 학살·트럼프 작심 비판

2025-05-14

제78회 칸국제영화제가 지난 13일(현지시간) 막을 올렸다. 축제의 첫날, 영화인들은 가자지구 집단 학살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영화 관세 정책 등 정치·사회적 현안에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올해 영화제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은 프랑스 배우 쥘리엣 비노슈는 이날 칸 팔레 드 페스티발에서 열린 개막식 무대에서 “전쟁, 기후 변화, 여성 혐오 등 우리의 야만성에는 출구가 없다. 이 거대한 폭풍에 맞서 우리는 상냥함(gentleness)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으로 목숨을 잃은 팔레스타인 사진작가 파티마 하수나를 애도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하수나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네 손 위에 영혼을 두고 걸어라>(세피데 파르시 감독)이 상영된다. 비노슈는 “그녀(파티마)는 오늘 밤 우리와 함께 여기에 있었어야 했다”면서 “세계 모든 지역에서 예술가들이 매일 싸우고, 저항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제 개막에 앞서 영화계 인사 380여명은 “가자지구에서 제노사이드가 벌어지고 있는데 침묵할 수 없다”며 영화계의 침묵에 항의하는 공개 서한을 보냈다. 배우 리처드 기어·마크 러팔로·하비에르 바르뎀, 페드로 알모도바르·조너선 글레이저 감독 등이 동참했다. 심사위원장 비노슈의 연설은 영화계도 ‘침묵하지 않겠다’는 응답으로 풀이된다.

공로상에 해당하는 명예황금종려상을 받은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드니로는 개막식 무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속물 대통령”이라고 지칭하며 비판을 쏟아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밖에서 제작한 영화에 100% 관세를 부과하는 절차를 검토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드니로는 이를 언급하면서 “창의성에는 가격을 매길 수 없지만 관세는 매길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공격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예술은 진실이기에 세계의 독재자와 파시스트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라며 영화인들에게 행동을 촉구했다. 드니로의 연설 이후 관중에서는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세계 곳곳에 정치적 혼란과 사회 갈등이 만연한 가운데 축제가 열린 탓일까. 영화인들은 ‘이 시대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찰하는 모습이었다. 개막식에 앞선 심사위원단 기자회견에서 각본가 레일라 슬리마니는 “영화제는 추악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인간의 모순을 보여줄 수 있도록 조명해야 한다”면서 “세계의 일부가 어둠에 잠겼을 때에도 아름다움, 예술, 생에 대한 추구(will to live)를 지키는 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슬리마니를 비롯해 배우 제러미 스트롱 등과 함께 경쟁 부문 심사위원 9명에 선정된 홍상수 감독도 기자회견과 레드카펫, 개막식에 참석했다. 홍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지난해에는 내가 만든 영화가 초청받지 못했는데, 올해 칸에 올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개막을 앞두고 칸 운영위원회 측은 ‘레드카펫 및 공식 행사에서 노출 의상 금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과도하게 부피가 큰 의상도 제한됐다. 영화제의 품위를 위한 조치였다는데, 일각에서는 과도한 규제라는 시선도 있었다. 심사위원단 기자회견에서 나온 이 규제에 대한 질문에 배우 할리 베리는 “저녁 레드카펫에서 입을 옷이 너무 커서 입지 못하게 되긴 했다”면서도 “과도한 노출 의상은 확실히 민망한 부분이 있으니, 좋은 (결정인) 것 같다”고 답했다.

올해 칸 영화제의 개막작은 프랑스 여성 감독 아멜리 보낭의 <리브 원 데이>(Leave One Day)다. 요리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셰프 세실(줄리엣 아르마네)이 부모님이 운영하는 고향 레스토랑에 돌아와 옛 연인을 재회하며 겪는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코미디 영화다. 보낭 감독의 첫 장편으로, 감독의 첫 장편이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AP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개막작 상영 이후 극장에선 5분간 기립박수가 이어졌다고 한다.

축제를 시작한 이번 영화제에서는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두고 총 22편의 영화가 경합한다. 최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 다른 국제영화제에서도 선전을 보였기에, 수상작에 관심이 집중된다. 이를테면 지난해 황금종려상을 받은 션 베이커의 <아노라>는 지난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등 5관왕을 휩쓸었다.

미국의 제작·배급사 네온(Neon)이 <기생충>(2019), <티탄>(2021), <슬픔의 삼각형>(2022), <추락의 해부>(2023), <아노라>(2024)에 이어 올해도 황금종려상을 배출할지도 관심사다.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신작 <알파>와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센티멘털 밸류>가 네온이 내놓은 작품이다.

피에르·뤼크 다르덴 형제의 신작 <영 마더스 홈>(JEUNES MÈRES), <미드소마>, <유전> 등 신선한 호러물로 잘 알려진 아리 애스터의 <에딩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등 영상미로 유명한 웨스 앤더슨의 <페니키안 스킴> 등 인지도 높은 감독의 작품들도 명단에 올랐다.

한국 장편 영화는 올해 칸영화제에 한 편도 초청되지 못했다.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안경>이 비평가주간 단편 경쟁 부문에,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허가영 감독의 <첫여름>이 시네파운데이션(학생 영화 부문)에 초대된 게 전부다. 한국 장편 영화의 칸영화제 초청 불발은 2013년 이후 12년 만의 일이다. 영화 외적으로 배우 김고은과 한소희가 브랜드 앰버서더 자격으로 레드카펫을 밟는다.

칸 영화제는 오는 24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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