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일당에서] 자신의 잘못 돌아보지 않고 남의 잘못만 헤아려서야…

2024-10-22

산마루 흰 구름

화양구곡서 오는길 채운암 들러

산마루에 구름이 걸려 있는 풍경

中 양나라 도홍경의 시가 떠올라

‘산 위에 흰 구름이 많습니다…

그대에게 갖다 드릴 수 없네요’

정치권 소식을 접할 때면 답답

왜 국민 의식 수준 못 따라가나

산중재상 찾아 마음 비울 생각을

맑은 마음 잃지 않는 사람 많길

최근 친구 서당에서 눈길 끄는 서예 작품을 보았다. 근처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서당에 차를 마시러 갔는데, 찻자리 뒤에 그동안 보아왔던 것이 아닌 새 작품 하나가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낙관 글씨를 보니 대구 출신의 걸출한 서화가 석재(石齋) 서병오(1862~1936)의 붓글씨 작품이었다. ‘불감지증군(不堪持贈君)’이라는 예서 작품이었다. 많이 보아왔던 석재의 글씨 작품과는 달랐고, 글귀도 그의 작품에서 본적이 없는 것이었다. 말년의 석재 작품인 것 같았는데, 그의 작품 중에서도 멋진 작품이라는 느낌이었다. 화랑 주인이 친구에게 소장할 적임자라며 권유해서 상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구입한 작품이라고 했다.

◇도홍경의 시

‘그대에게 가져다 드릴 수는 없다’라는 의미의 이 글귀는 중국 남북조시대 양(梁)나라 때 인물인 도홍경(陶弘景 456∼536)의 시 구절이다. ‘산중에 무엇이 있기에 조정에 들어오지 않는 것인가라는 양나라 무제(武帝)의 조서에 시를 지어 대답하다(詔問山中何所有賦詩以答)’라는 긴 제목의 시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중에 무엇이 있느냐고요(山中何所有)/ 산 위에 흰 구름이 많습니다(嶺上多白雲)/ 다만 나 홀로 즐길 수 있을 뿐(只可自怡悅)/ 그대에게 갖다 드릴 수는 없네요不堪持贈君)’

‘화양은거(華陽隱居)’라는 호를 스스로 지어 은거한 도홍경은 의약학자(醫藥學者)이자 도사(道士)이다. 29세 때에 큰 병에 걸렸던 것을 계기로 도교에 심취했으며, 의약학을 깊이 연구했다. 그는 도교에 조예가 깊은 뿐만 아니라 유(儒)·불(佛)·도(道) 모두에 정통해 양무제가 직접 그의 처소를 찾아 자문을 구하기도 해서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고도 불렸다.

양무제는 젊은 시절부터 도홍경의 재주가 출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황제가 된 후 여러 차례 화양동에서 은거하는 도홍경에게 조정으로 나와 벼슬할 것을 명하였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도홍경은 그러면서 ‘산중에 도대체 무슨 물건이 있기에, 산에서 나와 벼슬하는 것을 마다하는 것인가(山中有何物 以至于不願出山爲官)’라는 물음에 대해 이런 시를 지어 답한 것이다.

지난 1일 괴산 화양구곡에 갔을 때 도홍경의 이 시가 떠올랐다. 화양구곡의 4곡이 금사담(金沙潭), 5곡이 첨성대(瞻星臺), 6곡이 능운대(凌雲帶)이다. 구름을 뚫을 듯하다고 표현한, 크고 높은 바위인 능운대 뒤로 돌아가 100여m 가면 채운암(採雲庵 또는 彩雲菴)이 나온다. 9곡까지 갔다가 돌아 내려오는 길에 이 채운암에 들렀다.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정도만 있는 작은 사찰로 호젓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대웅전에서 바라보는, 첨성대가 함께 보이는 산세 풍경이 특히 좋았다. 부슬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는데, 멀리 보이는 산마루에 구름이 걸려 있는 풍경이어서 도홍경의 시가 떠올랐던 것이다. 채운암의 채운(彩雲)은 여러 가지 빛깔의 고운 구름을 의미하는데, 이곳 주위에 상서로운 채운이 나타나곤 했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채운암은 현재의 위치에서 화양천을 건너 마주보이는 첨성대 안쪽계곡에 있었다. 1277년에 도일 선사가 창건하고 ‘수도암’이라 했고, 1610년 혜식 선사가 중창한 뒤 ‘채운암’이라 개칭했다. 그리고 현 채운암 위치에는 1655년 혜일 선사가 ‘환장사(煥章寺)’를 창건했다. 환장사는 대한제국 말기 의병들의 활동 근거지가 되자 왜병들의 방화로 대웅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전소되었다. 그리고 건너편에 있던 채운암이 1948년 홍수로 매몰되자 건물의 목재 일부를 환장사로 옮겨 증축한 뒤 암자 이름을 채운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독특한 이력의 암자이다.

1844년 화양구곡에 대한 구곡시와 구곡 설명글을 남긴 송달수(1808~1858)의 글에도 채운암과 환장사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첨성대 북쪽의 훤히 트인 골짜기에 채운암(彩雲菴)이 있고, 능운대의 아래 그윽이 깊은 곳에 환장사(換章寺)가있다. 두 곳 모두 승려들이 거처한다. 절 앞쪽에는 운한각(雲漢閣)이 있다. 그 우측 석문에서 바위 위로 나가면 3칸의 암서재가 있다.’

◇채운암에서 본 풍경

채운암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대웅전 아래 마당에 있는 다보탑(모조 작품)이다.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을 그대로 모방해 만든 탑인데, 석가모니 사리를 구해 봉안했다고 한다. 올해 3월에 세운 탑이다. 깊은 계곡의 산속에서 낯익은 다보탑을 보니 반가웠고, 아직 깨끗한 화강암 빛깔 그대로이지만 정성들여 잘 만든 모습이어서 주위와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이 다보탑과 그 뒤로 펼쳐지는, 비구름이 머무는 산세를 한참 바라보았다.

산속 수행자는 자연을, 흰 구름을 단순한 풍경으로 즐기는 데 그치지 않았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 존재의 실체를 깨닫는 과정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깨달음의 결과를 표현하는 비유 수단이 되기도 했다. 조선의 대표적 선사인 청허 휴정(1520~1064)이 입적하기 전에 남긴 게송으로 알려진 시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생기는 것이고(生也一片浮雲起)/ 세상을 떠나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라네(死也一片浮雲滅)/ 뜬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고(浮雲自體本無實)/ 태어나고 죽고 하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라네(生死去來亦如然)’

불교 의식집인 ‘석문의범(釋門儀範)’에 나오는 이 글귀에는 다음 구절이 이어진다고 한다.

‘한 물건은 항상 홀로 드러나(獨有一物常獨露)/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네(湛然不隨於生死)’

한 물건은 불교 수행자들이 수행의 최종 목적인 부처의 경지에 이를 때 깨닫는 마음, 생사를 초월한 마음을 말한다.

휴정 스님은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다.

‘낮에는 차 한 잔/ 밤에는 잠 한 숨/ 푸른 산과 흰 구름은/ 더불어 생사 없는 법을 설하네(晝來一椀茶 夜來一場睡 靑山與白雲 共說無生死)// 흰 구름은 옛 벗이요/ 밝은 달은 내 생애/ 깊고 깊은 산 속에서/ 사람 만나면 차를 권하네(白雲爲故舊 明月是生涯 萬壑千峰裏 逢人則勸茶)’

우리나라 여야 정치권 소식을 접할 때면 언제나 답답하다. 안타깝기도 하고. 왜 국민의 상식이나 의식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가. 지금도 곳곳에 도홍경 같은 산중재상이 있을 것이니, 이들을 찾아가 욕심을 비울 생각을 좀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산중재상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잠시만 자신의 마음을 고요히 해서 맑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답이 절로 나올 것이다. 자신의 잘못이나 욕심을 돌아볼 생각은 않고, 남의 잘못만 헤아리고 구차한 변명거리만 찾으려 하니 무슨 좋은 소식을 내놓을 수가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박수 속에 국민을 위한, 보람 있는 일을 하며 멋진 삶을 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건만, 무슨 마력에 이끌려서인지 혼탁한 물결에서 빠져나와 ‘멋진 언행’을 보여주는 인물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한강 소설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과 그의 언행은 심한 갈증을 겪다가 맑은 샘물을 만나 시원하게 마시는 기분이었다. 그는 많은 찬사 속에 ‘현대 산문의 혁신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혁신은 탁한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다. 그는 또 세계 곳곳의 치열한 전쟁 속에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고 기자회견을 하겠느냐면서 기자회견을 안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그의 아버지인 한승원 소설가가 대신 전했다.

청명한 날씨가 이어지는 가을이다. 산 위에 떠가는 구름이든, 마음속의 흰 구름이든 수시로 바라보며 스스로 성찰, 맑은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글·사진=김봉규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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