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광장의 키세스’를 보다가 최윤의 <회색 눈사람>을 떠올렸다. <회색 눈사람>의 시대 배경이 출판, 표현의 자유가 탄압받던 유신 체제다. 최윤은 1988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을 다룬 중편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로 소설가로 등단했고, 1992년 <회색 눈사람>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한다.
소설은 작중 화자인 강하윤이 20년 전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빌려줘 도피시킨 인물이 뉴욕 거리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신문 기사를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20년 전 그 인물과 관련된 대학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식이다.
화자인 강하윤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어 이모의 돈을 훔친다. 그 돈은 이모부의 병원비였다. 그랬기에 하윤의 대학 시절은 절망, 무기력, 외로움으로 가득했고, 언제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버틴다. 하윤은 헌책방에서 책을 사고, 읽은 책을 되팔아 다시 책값을 마련하곤 한다. 어느 날 중고서점에 내놓은 자신의 책 <폭력적 시학: 무명 아나키스트의 전기>라는 책을 사려고 하는 ‘안’을 만난다. ‘안’은 하윤에게 자신이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일할 것을 제안한다. 일한 지 얼마 후, 우연히 인쇄소가 밤에는 소위 불온서적을 만드는 비밀회합의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안’은 어느 날, 하윤에게 저녁을 먹자고 제안하고는 느닷없이 “그래 뭐 좀 알아냈느냐, 열심히 내 뒷조사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질문에 답하는 하윤의 마음이 인용문에 실려있다.
“그렇지만 나는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공연히 속이 꽉 막혀 왔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에 여행할 때 당신은 불빛이 있는 쪽으로 걷지 않나요. 내가 그 불빛을 당신의 인쇄소로 정했다 해서 내 여행이 죄스러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가끔 당신에게는 하찮은 그것이 위로될 때는 없습니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목소리나 어떤 분위기 같은 것 말입니다. 내가 당신의 목소리와 당신들이 하는 일을 선망으로 바라보면서 약간의 안도와 위로를 얻었다고 해서 당신에게 누가 된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는 것으로 ‘안’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이 말들을 삼켜 버렸다.”
인쇄소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는 그들을 선망으로 바라보며, 위로와 희망을 얻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어김없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눈이 오는 날, 아이들이 힘을 합쳐 눈사람을 만드는 장면에서 일어나고, 비밀회합이 드러나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책을 편집 교정했을 뿐인 하윤이 자신의 기억으로 그 책의 모든 내용을 재구성하는 장면이 놀랍고, 마지막으로 엄마를 찾아가려고 만들어 둔 자신의 여권으로 한 사람을 뉴욕으로 도피시키는 것이 그렇다.
오영애 울산환경과학교육연구소 대표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