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벌
시안 에번스 지음
정미현 옮김
열린책들
1935년 6월 영국 런던에 있는 에메랄드 커나드의 저택에서 성대한 오찬회가 열렸다. 이 자리엔 윈저공 데이비드 왕세자(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으로 널리 알려진 월리스 심프슨(어니스트 심프슨의 아내), 훗날 영국 총리가 되는 윈스턴 처칠, 그리고 히틀러가 영국에 파견한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특사 등 당대의 명사들이 함께했다.
왕세자는 이듬해 부친 조지 5세의 승하로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이혼 경력이 두 번이나 있는 미국인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아 결국 재위 11개월 만에 왕좌를 동생(조지 6세)에게 양위했다. 사람들은 화려한 크라운 대신 결혼반지를 선택한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의 결혼을 일컬어 ‘세기의 로맨스’라 부른다.
그렇다면 왕세자와 이혼한 유부녀 간의 애틋한 사랑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에메랄드 커나드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는 당시 영국 최상류층 사교계를 쥐락펴락했던 6명의 ‘여왕벌’ 중 한 명이다. 에메랄드 커나드, 낸시 애스터, 시빌 콜팩스, 로라 메이 코리건, 마거릿 그레빌, 이디스 런던데리 등 6명의 사교계 여왕들은 왕세자 등 로열패밀리와 총리, 장관, 의원, 대사 등 당대의 실력자들과 밀접한 교류를 통해 막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오프라인 인플루언서들이다.
영국 문화사학자 시안 에번스가 지은 『여왕벌』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엮은 흥미 만점의 역사다큐멘터리다. 6명의 여왕벌들은 모두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인 1863년부터 1879년 사이에 태어났다. 그들은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인 전간기(戰間期)에 정계, 왕실, 연극계, 과학계, 예술계 등 다양한 분야의 걸출한 유명 셀럽들과 ‘그들만의 리그’에서 내밀하게 교유하면서 영국과 유럽 나아가 세계를 들었다 놨다 했다.
데이비드 왕세자와 월리스 심프슨 곁에는 에머럴드 커나드뿐 아니라 다른 여왕벌들도 모여들었다. 커나드는 왕실의 로맨스를 부추기는 재미를 즐기는 쪽이었다. 국왕이 된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을 파티에 초대했던 시빌 콜팩스는 그들 연애사 전체를 더 낭만적인 시선으로 보았다. 이디스 런던데리는 왕세자가 이미 이혼 경력이 있는 유부녀와 사귀는 것을 원칙적으로 반대했지만 그녀 역시 월리스를 만찬에 초대하곤 했다.
여왕벌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조건 좋은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었고 이를 십분 활용해 권력층 깊숙이 진입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계급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매력과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든든한 인맥의 후광을 업고 스스로도 독자적인 유력 인사가 됐다. 사교계의 여왕들은 흥겹고 편안한 분위기의 연회장처럼 꾸민 저택의 호화로운 응접실과 우아한 거실로 각계의 유명인, 비범한 인재, 미남, 미녀, 부자 등 당대에 두각을 나타내며 활동하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불러 모아 즐거운 환대를 베풀면서 자신들의 비즈니스를 키웠다.
낸시 애스터와 이디스 런던데리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으나 나중에는 자기 나름의 급진적인 사회적 이상을 키워 나갔다. 토리당의 여성 실세 런던데리는 최초의 노동당 출신 총리 램지 맥도널드와 서로 집을 방문하는 막역한 사이가 됐다.
마거릿 그레빌은 히틀러나 그의 돌격대원인 ‘브라운셔츠’에 대한 호기심과 애초에 잘못된 팬심 때문에 복잡한 국제 정치판에 얽혀들기도 했다. 코리건은 2차 대전 당시 나치 점령 하의 파리에 남아 숱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상당 금액의 재산을 헌납해 자선 활동을 지원하는 등 모두의 예상을 깬 용감한 행보를 보여 줬다.
그레빌은 영악한 여성 사업가이자 영국 최고의 부자로 등극했으며 애스터는 여성에게 참정권이 허용되면서 의회 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애스터와 런던데리는 18세 미만 주류 판매 금지법 등 여성 권익 보호를 위한 법안 도입에 힘썼고 국가에서 자금을 지원하는 전문 산파를 제공해 산모와 영아 사망률을 낮추는 데도 기여했다.
한마디로 6명의 여왕벌들은 격이 다른 파티를 주관할 줄 아는 전문가들이었다. 이 책은 100년 전 아득한 이야기를 담기는 했지만 지금 읽어도 전율이 흐른다. 장대한 OTT 드라마 시리즈를 방불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