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바버라 F. 월터 지음 |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336쪽 | 2만2000원
1776년 건국 이후 세계 민주주의의 선도 국가였던 미국에서 내전이 일어날 수 있을까.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질문을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연방의회 의사당을 습격한 2021년 1월6일 이후 미국에서는 내전을 더 이상 후진국들의 전유물로 치부하기 어렵게 됐다.
내전과 테러리즘 전문가인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 특훈 교수 바버라 F. 월터는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에서 미국이 내전 발발 가능성이 높은 ‘위험 구간’에 접근하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1974년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테드 로버트 거 교수가 고안한 아노크라시(anocracy)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거 교수는 전 세계 국가들의 정치 체제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해 ‘정치체 점수’를 매겼다. 완전 독재 국가는 -10점, 완전 민주주의 국가는 +10점이다. 아노크라시는 정치체 점수표에서 -5점에서 +5점 사이의 점수를 받는 국가로,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에 해당하는 국가다. 저자에 따르면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완전 독재나 완전 민주주의에 가까울수록 낮아지고, 아노크라시 상태일수록 높아진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 당선 전인 2016년에는 정치체 점수가 +10점이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 시도했던 2020년 대선 직후 +5점으로 급락했다. 불과 몇 년 만에 완전 민주주의에서 아노크라시로 전락한 것이다. 미국의 정치체 점수가 +5점이 된 것은 건국 초기인 1800년 이후 200여년 만이다.
어떤 국가가 아노크라시가 되면서 내전 발생 가능성이 높아지는 데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 먼저 독재였다가 급속한 민주화를 경험할 때다. 2003년 미국의 침공을 받아 사담 후세인 체제가 몰락했지만 안정적인 민주정이 수립되는 대신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내전으로 이어진 이라크가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은 반대의 경로, 다시 말해 민주주의가 쇠퇴하면서 아노크라시 상태가 되는 경우다. “민주주의가 쇠퇴하는 경우에 내전의 위험성은 민주주의에서 후퇴하는 바로 그 순간에 높아진다.” 예컨대 우크라이나는 2013~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권위주의적 대통령이 탄핵됐으나 러시아계가 많은 동부 지역의 분리주의 반군이 자치 국가를 선포하면서 내전으로 돌입했다.
그러나 어떤 국가가 아노크라시 상태라고 해서 반드시 내전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내전 발생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가장 강력한 신호는 ‘파벌주의’의 등장이다. 파벌주의는 정책이 아니라 종족이나 종교 같은 정체성에 따라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며, 경쟁 세력과의 타협이 아니라 완전한 제압을 목표로 삼는다.
미국에선 이런 파벌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파벌을 가르는 일차 기준은 인종이다.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에서는 백인이라도 노동계급인 경우에는 주로 민주당을 지지했다. 2007년까지만 해도 백인은 공화당과 민주당을 고르게 지지했다. 그러나 지금은 공화당 지지자의 90퍼센트가 백인이다. 인종에 이어 종교도 파벌화를 부추겼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절반이 비기독교인인 반면 공화당의 3분의 2는 백인 복음주의자다.
트럼프는 흑인을 폭력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멕시코인을 범죄자로 몰아세움으로써 종족적 파벌주의를 부추겨왔다. 이는 지난 50년간 그 어떤 공화당 대통령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공화당 또한 의회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트럼프의 파벌주의 행보를 방관했다.
합법적 총기 휴대가 가능한 미국에서 극우 민병대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도 저자가 미국의 내전 발생 가능성을 우려하는 이유다. 2008년 이전 미국의 민병대가는 43개였으나 2011년에는 334개로 늘어났다. 1970년대 미국의 폭력적 극단주의 조직은 대부분 좌파 성향이었으나 지금은 백인 우월주의 성향 조직이 대다수다.
저자는 미국이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의 10단계’ 중 5단계에 해당하는 ‘조직화’ 단계를 지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조직화’ 단계란 “지배적인 집단이 군대나 민병대를 모아서 다른 집단들을 근절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시기”다. 오스 키퍼스, 아톰바펜 디비전, 부걸루 보이스 같은 극우 조직들은 ‘인종전쟁’과 ‘내전’을 거론한다. 조지아주의 공화당 하원의원인 마저리 테일러 그린은 “자유를 되찾는 길은 피의 대가를 치르고 얻는 것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저자는 미국에서 내전을 막기 위해서는 법치를 강화하고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백인 노동 계급 사이에서 극우 조직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다. 또 반란 행위에 대해서는 “반란자들을 체포, 기소하고 그들의 자산을 압류함으로써” 활동을 위축시켜야 한다.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소셜미디어에 대한 규제다. 저자는 “소셜미디어만큼 파벌화를 부추기고 가속화하는 것은 없다”면서 “소셜미디어 확성기를 치워 버리고, 협박꾼, 음모론자, 봇, 트롤, 가짜 정보 전파 기계, 혐오 장사꾼, 민주주의의 적들이 떠들어 대는 스피커 소리를”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기 전인 2022년에 출간됐다. 저자가 내전 예방책으로 거론한 법치 강화, 사회경제적 취약층 지원, 반란 행위에 대한 단호한 처벌, 소셜 미디어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가능할까. 미국 민주주의의 앞날이 우려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