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투자가 복지인 시대

2025-11-07

코스피가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흥미로운 것은 주식시장이 이해되는 방식이다. 수많은 개미투자자가 주식 투자를 일종의 생계 활동으로 간주한다.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것’처럼 ‘먹고살기 위해 투자한다’는 것이다. 주가 상승은 현 정부의 대선 공약이다. 지난 6월 민주당은 심지어 ‘코스피 5000 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이들 역시 주가 상승을 ‘먹고사는 문제’로 접근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국가가 다루는 ‘먹고사는 문제’란 무엇보다 두 가지를 의미했다. 하나는 일자리와 노동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보장이다. 이 두 가지의 결합 방식에 따라 복지국가의 유형이 달라진다. 여기에 가장 큰 변화를 불러온 것이 신자유주의였다. 이 개념으로 현재 한국을 설명하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다른 상황이다.

신자유주의 국가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 적극 개입해서 시장화, 상품화, 효율화의 논리를 도입하려 시도한다. 그렇다고 노동과 복지의 중요성이 무시되지는 않는다. 즉 ‘먹고사는 문제’는 여전히 이 두 가지에 기초하며, 이를 어떻게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할 것인지가 새로운 문제로 제기된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노동과 복지의 신자유주의화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요즘에 노동시장 유연화, 공적 서비스 민영화, 복지 서비스의 상품화 따위를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은 이미 예전에 극단적인 수준으로 완료됐기 때문이다).

그보다 ‘먹고사는 문제’의 정의 자체가 바뀐 것처럼 보인다. 즉 노동과 복지가 사라지고, 금융경제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먹고사는 데 가장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활동이 무엇인가? 바로 부동산과 금융 자산에 투자하는 것이다. 일자리를 찾아 취직하고,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고, 사회 서비스를 강화해 삶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 따위는 오히려 보조적 수단으로 간주한다. 정부와 여당은 주가 상승이 마치 무슨 복지정책인 것처럼 말한다.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코스피를 5000으로 끌어 올리겠습니다’라는 식이다.

눈여겨볼 만한 또 다른 사례가 있다. 한국의 민간 은행은 1990년대에 역모기지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주택을 담보로 월 일정액을 대출받는 금융상품이다. 하지만 관련 시장이 성장하지는 않았고, 2000년대에 노인빈곤 문제가 주목받기 시작하자, 국가가 보증하는 역모기지 상품이 개발됐다. 재미있는 점은 이 상품을 주택연금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국가가 운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명백히 대출상품인데 왜 여기에 ‘연금’이라는 이름을 붙이는가?

주택연금을 직접 신청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실제 운영되는 방식도 완전히 대출상품이다. 그래서 ‘국가가 내 생활을 보장해주는구나’라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고, ‘역시 한국에서 살려면 집이라도 한 채 있어야 하는구나’라는 사실만 재확인하게 된다. 물론 일정액을 매월 수령한다는 점에서 ‘연금과 비슷한 형식’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연금’으로 규정하긴 어렵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연대에 기초한 재분배 수단을 의미한다. 주택연금을 국민연금이나 공무원연금 따위와 같은 범주에 묶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퇴직연금도 마찬가지다. 이 명칭을 들으면 자연스레 영어 ‘펜션(pension)’을 떠올리게 된다. 노동자가 임금의 일정 부분을 분담금으로 내고, 퇴직 후에 매월 수당을 받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여기에 해당하는 제도가 따로 있는데, 바로 국민연금이다. 영어 명칭도 National Pension Service다. 그럼 퇴직연금은 무엇인가? 내가 받은 퇴직금으로 운영하는 금융상품이다. 이것을 국민연금과 비교해보자. 돈을 받는 형식이 비슷하다는 점 외에는 공통성이 거의 없지만, 둘 다 연금이라고 불린다.

주택연금과 퇴직연금은 사회보장제도가 아니다. 내가 내 소득이나 자산으로 안정적 생활을 유지하도록 보조해주는 금융상품일 뿐이다. 이런 상품의 독특한 점이 있다면 국가가 직접 관리하면서,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인 것처럼 포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포장이 가능한 것은 개인들도 사회보장과 금융상품을 엄격히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받는 돈의 액수일 뿐, 그것이 사회보장 수당인지 아닌지는 별 상관이 없다. 국민연금에 대해 불만을 갖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사회보장제도로서의 국민연금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는 대부분 별 관심이 없고, 자신이 받을 돈의 액수만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국민연금에 낼 돈으로 차라리 주식 투자를 해서 더 높은 수익률을 노려보겠다는 반응이 나온다.

지난 9월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저신용자의 대출 금리가 높은 것이 ‘너무 잔인하지 않냐’고 반문한 적이 있다. 며칠 후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는 저신용자가 고금리를 부담하는 것이 ‘역설적’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일부 언론은 이를 두고 시장 원리에 대한 부정이라고 비판하는데, 현 정부와 여당이 대출 시장의 논리를 모르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 저런 발언을 한 것일까? 여기에는 대출을 일종의 복지제도로 보는 관점이 개입돼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경기도지사 재임 시절에 이미 ‘복지적 대출제도’의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사례는 모두 비슷한 경향을 공유한다. ‘노동’과 ‘복지’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촌스러운 일로 취급되는 것이다. 이런 영역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간주되고, 모두가 금융만 이야기한다. 마치 가난한 자를 위한 최선의 복지제도는 서민 대출이고, 가난하지 않은 자를 위한 최선의 제도는 투자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는 순수한 환상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금융상품과 주가 상승이 시민의 삶을 개선한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이게 노동과 복지를 대체할 수는 없다. 개인을 먹여 살리는 가장 기초적인 활동은 여전히 노동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생활을 보장하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은 여전히 사회보장이다. 지금 한국에서 살기 어려운 이유도 불평등한 노동시장과 허약한 사회 서비스에 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부자 되기’와 ‘먹고사는 문제’가 뒤섞이고,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기준이 파괴된 사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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