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은 질병인가? 문화인가?'
'게임이용장애(Gaming Disorder)' 질병코드 도입을 둘러싼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제도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업계는 낙인효과와 창작 활동 위축을 우려한다. 문체부와 정치권에서도 '과학적 근거 미비' 및 '사회적 합의 부족'을 이유로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전자신문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콘텐츠진흥원, 게임문화재단, 민주당 게임특별위원회, 법조계 등 다양한 전문가들과 질병코드 등재 진행 상황과 문제점을 집중 진단했다.
〈참석자〉(가나다순)
△강태욱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송진 한국콘텐츠진흥원 센터장 △이영민 문화체육관광부 게임과장 △조수현 게임문화재단 사무국장 △황희두 더불어민주당 게임특위 위원장 △사회=박정은 전자신문 기자 △정리=남궁경 전자신문 기자
◇사회(박정은 전자신문 기자)=WHO 질병 코드가 국내 KCD로 도입될 가능성이 재차 제기되고 있다. 현재 어떤 상황인가.
◇이영민 문화체육관광부 게임콘텐츠산업과장=문체부는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도입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해 왔다. 게임은 여가이자 종합문화예술로 자리 잡은 콘텐츠다. 도박이나 알코올 중독처럼 의학적으로 명확한 해악이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게임에 질병코드를 부여하는 것은 과도한 낙인효과를 낳을 수 있다. 현재 민간협의체 차원에서 보건복지부·통계청과 함께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의료계와 게임업계 간 입장차가 여전히 크다.
문체부는 게임의 긍정적 기능에 주목하고 있다. 게임은 창의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높이는 도구이자, 글로벌 콘텐츠 산업의 핵심 자산으로 성장해왔다. WHO 기준을 그대로 국내에 반영할 경우 산업적·문화적 맥락이 무시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하는 부분이다.
◇사회=게임이 질병코드로 등재될 경우 산업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한 우려가 크다.
◇송진 한국콘텐츠진흥원 산업정책센터장=선후 관계를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주기 때문에 질병코드에 반대한다기보다, 과학적 근거 없이 질병코드가 도입되면 그 자체로 산업에 불필요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만약 게임이 도박이나 마약처럼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해악을 유발한다면 피해가 크더라도 제도적 규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게임이 그런 문제 행동의 원인이라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질병코드가 등재된다면 오히려 낙인효과 등으로 산업 전반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특히 게임은 첨단 기술과 융합된 산업이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분야다.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이용자 저변 축소를 넘어 인재 유입 감소, 콘텐츠 창작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어 중장기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다. 게임을 둘러싼 사회적 편견도 해결과제다. 미디어와 교육 현장에서 게임을 일률적으로 중독 원인으로 몰아가는 경향은 게임 생태계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이러한 프레임은 산업 경쟁력은 물론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서의 입지에도 부정적이다.
◇조수현 게임문화재단 사무국장=재단은 권역별로 게임과몰입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현장에서 느끼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게임이 곧 질병'이라는 낙인효과다. 게임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는 듯 몰아가는 것은 마치 학창 시절 책에 몰입한 아이를 '소설 중독'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은 비약이다. 게임 과몰입은 개인의 심리·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자체로 병이라 단정하는 것은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출발한 잘못된 인식이라고 본다.
◇사회=정치권의 입장과 대응도 주목받고 있다. 민주당 게임특위에서 이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떤 대응 전략을 계획 중이신지 소개 부탁한다.
◇황희두 더불어민주당 게임특별위원회 위원장=정치권에 와서 게임이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는 대상이라는 점을 체감했다. 게임은 공동체적 경험과 전략적 사고, 인내심을 기를 수 있는 훌륭한 문화 콘텐츠다. 그럼에도 여전히 학부모나 의료·종교계에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크다보니 정치권에서도 쉽게 게임을 희생양 삼는 경향이 있다.
동시에 게임을 문화로 인식하는 청년층과 부모 세대 간 간극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최근에는 부모가 먼저 자녀에게 게임을 제안하거나, 함께 플레이하며 소통의 매개로 활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정치적 판단에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앞으로 게임특위는 질병코드 도입에 대해 명확히 반대 입장을 갖고 대응할 계획이다. 통계법 개정안도 함께 추진 중이고, 향후 장기적인 정책 대응 로드맵도 준비하고 있다.
◇사회=게임 이용장애 질병코드 등재 관련 제도적 절차나 법률적 쟁점이 있다면.
◇강태욱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를 도입하는 행위 자체는 의료·통계 행정상의 절차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헌법적 권리와도 연결된다. 게임은 문화의 한 장르이자 창작물이다. 이를 과학적 근거 없이 질병으로 분류하면 문화국가 원칙에 위배될 수 있으며 게임 이용자와 개발자의 행복추구권, 여가 자기결정권, 표현의 자유까지 침해될 우려가 있다.
질병코드 도입은 단순한 의료 통계를 넘어 실질적인 규제 수단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있다. 일부 지자체에서 조례를 근거로 게임시간 제한이나 공공장소 게임 금지 등의 조치가 시도될 수 있다는 점도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또 통계청이 WHO의 질병 분류를 국내 'KCD'로 반영할 때 반드시 전부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석상 논쟁이 있다. 현재로도 필요한 코드만 선별해 반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법 해석이 지배적이다. 나아가 논란을 방지하기 위한 통계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돼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사안이 국제적으로도 논쟁적인 이유는 WHO가 ICD-11에 '게임이용장애'를 넣을 당시 근거가 매우 부족했다는 점이다. 당시 회의에서 참고된 논문 수가 40여편에 불과했고 그나마 아시아 일부 국가 중심의 연구가 주를 이뤘다. 의학계 내부에서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 존재한다. 미국 정신의학회 역시 DSM-5에 '인터넷 게임 장애'를 '추가 연구가 필요한 항목'으로만 등재해 두고 있다.
◇사회=결국 제도적 수용 여부는 행정 편의나 관성보다는, 과학적 근거와 사회적 합의라는 기준이 선행돼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지금까지 축적된 게임 이용장애 관련 연구결과는 어떠한가.
◇송진 센터장=결론부터 말하자면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으로 분류할 만큼 명확한 인과관계나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하지만 게임이 인과관계상 문제를 유발한다 식의 접근은 비교적 쉽게 입증할 수 있는 반면 '게임이 문제의 원인이 아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이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다.
콘진원에서 5년간 게임 이용자 대상 장기 코호트 연구 및 자기공명영상(fMRI) 임상 연구를 병행했다. 이용자들을 '선용군', '일반군', '과몰입군'으로 나눠 추적했는데 게임 과몰입을 2년 이상 지속한 사례는 극소수였고 5년간 지속한 경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게임 자체가 병의 원인이 아니라 개인의 심리적·사회적 환경이 게임 이용 특성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조수현 국장=현장에서도 게임이 원인인 사례보다는 기저 질환에 따른 결과로서 게임 과몰입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마약이나 도박과 같은 중독 물질이라는 전제로 게임을 다루고 있어 과잉 의료화에 대한 우려가 있다. 이는 실제로 치료 접근성이나 가족 내 소통을 오히려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사회=그렇다면 게임이용장애를 두고 향후 사회적 논의는 어떤 방향으로 전개돼야 하면 좋을지, 실질적 대안과 대응 전략에 대해 한말씀 부탁드린다.
◇이영민 과장=지난해말 WHO 관계자를 직접 만나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에 반대하는 한국 문체부 입장을 전달했다. 앞으로도 민간협의체를 통해 복지부·통계청과 논의를 이어가는 동시에 콘진원, 게임문화재단 등과 협력해 국내외 과학적 연구 강화, 국민 인식 개선 사업, 전문가 대상 공청회 등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황희두=정치권에서 보자면 게임 커뮤니티와 유저들 목소리가 산발적으로 퍼져 있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보통의 게이머뿐 아니라 게임에 익숙하고 친화적인 학부모 세대 또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줄 필요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에서도 정책 포럼·세미나·예산 대응 등 다방면에서 견제 활동을 이어갈 방침이다.
◇송진 센터장=올해 콘진원에서는 기존 연구 성과를 쉽게 풀어 쓴 '게임 과몰입 해설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청소년·학부모 대상의 게임 리터러시 교육도 확대하고자 한다. 아울러 게임 이용의 긍정적 측면을 가장 잘 부각되는 분야가 기능성 게임인 만큼 다양한 사례를 활용한 공공 캠페인도 펼쳐나갈 계획이다.
◇강태욱 변호사=앞서 일본에서도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논의가 있다. 당시 충분한 연구 데이터가 없다는 이유로 도입을 보류했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연구 중이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지금이 급하게 도입을 결정할 시점인가'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현재는 제대로 된 연구 결과가 있는지 여부조차 사회적 합의가 불충분하다. 그렇다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연구를 하고 도입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본다.
◇조수현 국장=재단은 교육부, 문체부 등과 협력해 전국 학부모 대상의 게임 리터러시 교육을 확대하고 전국 8개 권역에서 운영 중인 게임과몰입 상담센터의 내실화에도 속도를 낼 방침이다. 무엇보다 게임 또한 '진지한 여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제고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가며 즐기는 골프나 스쿠버다이빙 혹은 대중 여가로 자리잡은 여행, 영화 등과 같이 게임 또한 많은 국민이 진지하게 즐기는 문화 활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박정은 기자 jepark@etnews.com, 남궁경 기자 nk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