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광장도 이런 날을 기다렸다

2025-05-11

2025년 4월 24일 아내와 함께 나선 광화문 광장 나들이에는 낯선 풍경이 가득했다. 자동차가 붐비는 백주대로 옆 광장에 사람들이 다양한 포즈로 누워있었다. 잠든 이, 눈을 감고 있는 이, 눈앞에 무언가 펼쳐 든 이, 허공을 쳐다보는 이. 양옆이 터져있는 앙증맞은 모습으로 세워진 일인용 텐트 안의 모습이었다.

이 정도 ‘인파’가 공개적인 장소에 공공연하게 누워있는 건 여름철 해변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기대는 의자에 앉아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책을 읽고, 멍을 때리고, 생각에 잠기고, 정담을 나누는 편안한 표정의 사람들. 점심을 마친 젊은 직장인들의 밝은 기운. 엄마와 아빠는 아장아장 걸어오는 아이를 보며 팔을 벌린 채 웃음꽃을 피웠다.

소음과 무단 점거의 광장에서

마침내 휴식·문화의 공간으로

세종이 이웃 어른처럼 느껴져

도시의 한복판, 세종로 광화문 광장은 바삐 경유하는 통로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정착하여 쉬고 머무는 공간이었다. 시민들이 각자의 자유와 휴식을 즐기는 평화로운 장소가 되고 있었다. 광화문 광장도 시민을 주인으로 모시는 이런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정치인의 취향에 따라 모양을 바꾸는 실험장 노릇에 지치고, 자동차 위주 행정으로 사라진 사람들의 체취가 그리웠을 것이다. 시위대의 무법 악다구니 소음, 확성기의 포효, 무단 점거와 천막, 탈법 행위와 행진을 겪으며 ‘공동체의 광장’으로서 역할을 상실한 자괴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광장의 세종대왕 조각상 근처에서 지하와 연결된 계단은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의 자료실로 이어졌다. 일반 백성이 글자를 몰라서 뜻을 전하고 함께 나눌 수 없는 고충을 풀어주려는 애민 리더십으로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었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생각을 지닌 학자들을 집현전에 모아서 협력하며 한 우물을 팔 수 있도록 통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대주의의 거센 방해 압박을 물리치는 과정이었다.

충무공은 당파의 이익을 앞세우는 무리로 인해 망국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다. 백성을 배려하는 전략, 부정과 부패에 대한 신상필벌, 나라를 위한 백의종군은 무고한 충무공을 한양으로 압송하는 무도한 권력의 수레를 백성들이 울면서 부여잡게 하는 공감의 리더십이었다. 간신 모리배들의 모함과 임금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숱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아직 12척의 배가 있고, 저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의 요지부동 애국심으로 일관하였다. 노량해전에서는 유탄을 맞고도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순국의 순간까지 나라를 위했다.

광장 옆의 세종문화회관에는 백남준(1932~2006) 선생의 ‘아카이브전’이 열리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로봇·텔레비전·비디오·위성방송을 활용한 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통한 실험적 작품으로 현대 디지털 예술을 개척한 역동적인 일생이었다. 전시회 자료는 ‘기술을 단순한 도구가 아닌 창조적 표현의 요소로 삼고 기술·철학·사회적 맥락을 탐구함으로써 현대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고 기술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백남준의 추상적 아이디어를 조형물과 설치 작품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협업자였던 마크 팻츠폴은 백남준을 “함께 일 한 사람들에게 깊은 신뢰와 신의를 준” 믿기지 않는 창의적인 천재라고 회고한다. 선생은 능력이 뛰어나면 인품이 부족하다는 세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거인이었다.

참 신나고 뿌듯한 4월 24일 광화문 광장이었다. 안식의 장소로 돌아온 광장에는 대결과 단절 대신 유·무언의 소통과 환한 표정이 가득했다. 먼발치에서 보며 대충 지나쳤던 세종대왕과 충무공은 곁으로 다가와 얘기를 나누며 다정한 이웃 어른이 되었다. 변모한 광장은 사람들의 뇌가 집중력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휴식(앤드류 스마트, 『생각을 멈추면 깨어나는 뇌의 배신』)을 주고, 자연스럽게 자유민주주의 공동체의 시민으로 사는 행복을 선사했다. 새로운 광장에서 새로운 시민이 탄생하는 거였다.

“정치만 빼면 너무 좋은 대한민국.” 아내와 나는 참 쉽게 만장일치를 이루었다. 어이없는 비상계엄, 무차별 탄핵 시도와 위협 같은 잘못은 사과할 줄 알고, 삼권분립 민주주의를 파괴하지 않고, 다수결 전횡에 의한 비상식적 입법은 하지 않고, 막말과 폭력 언어를 쓰는 자는 퇴출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지 않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한 대한민국의 다음 발전 방안과 같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논쟁’하는 정치를 보고 싶다는 데도 동의했다.

광장의 하늘은 푸른 물감이 떨어질 듯 푸르고, 광장의 바람은 엄마의 손길처럼 아늑했다.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커뮤니케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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