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3년 10월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이후 72년간 한국 정부가 미국과 협약을 체결할 때마다 가장 많이 입에 올리던 말은 바로 ‘윈윈’이다. 양국 경제가 안보 동맹과 끈끈하게 엮이면서 미국은 냉전 시기 이후에도 소련과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 주도권’을 얻었고, 한국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친미(親美)’가 곧 ‘선(善)’처럼 통용되는 까닭도 공동의 이익과 신뢰를 추구했던 역사에 기인한다.
문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대에는 한미 윈윈 문법을 다시 써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가 상호관세 위협에 자세를 낮추고 3500억 달러라는 숫자와 ‘아첨의 외교’로 승부한 결과는 참담하다. 돌아온 것은 외환시장 붕괴에 대한 일말의 고려조차 없는 현금성 투자 압박과 불공정한 자동차 관세뿐이다. 외환보유액의 84%, 내년도 국가 예산의 67%를 현금으로 줘야만 애초 관세가 0%였던 나라에 15%의 세금만 매기는 ‘호혜’를 베풀 수 있다는 게 트럼프 행정부의 논리다. 1882년 구한말, 미국에 무역 최혜국 대우를 부여하고 조선은 관세 자주권을 일부 갖기로 한 조미수호통상조약도 이렇게 약탈적이지는 않았다.
이재명 정부가 윈윈 사례로 거론하는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조차 한국의 일방적인 비위 맞추기 사업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미국의 조선업은 1920년 이른바 ‘존스법’ 이후 혁신에 실패하면서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다. 현지 숙련공도 거의 없고 조선소 규모도 한국의 중소형 사업장만 못하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이미 9만 달러에 육박한 나라가 3만 5000달러 안팎에 불과한 국가의 지원을 받아 노동집약적산업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발상 자체가 난센스다. 최근 필리조선소를 다녀온 한 기업인은 기자에게 “한화가 인수 금액의 수십 배를 투자해도 10년 안에 배 한 척 제대로 만들지 못할 정도로 낙후됐다”며 “이런 조선소에 강제로 투자해야 할 정도로 한국이 약소국인가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고 토로했다.
더욱 암울한 것은 동맹국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제로섬’ 인식이 40대였던 1987년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기조를 유지하고 있어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부터 방송·광고를 통해 동맹국들이 공짜 보호, 무역흑자를 누리면서 미국을 이용만 한다며 관세가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지금도 GDP의 125%까지 증가한 미국 재정적자의 책임을 저임금을 쥐어짜 물건을 판 동맹국에 떠넘기고 있다. 이달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전후해 양국이 무역 협정을 맺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이 이후 추가 청구서를 내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면 한국이 참고해야 할 미국의 무역 상대국은 어디일까. 외려 최근 가장 눈에 띄는 국가는 적성국인 중국이다. 중국은 희토류 수출, 대두 수입, 인공지능(AI) 반도체 자립, 해운 운임 등을 하나씩 무기화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아픈 구석을 쉬지 않고 찌르고 있다. 자국의 독보적인 무역 경쟁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맞불 대책으로 꺼내 들면서 내년 11월 중간선거를 걱정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불안을 흔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1기 때 무역전쟁을 한 차례 치른 데 따른 학습 효과다.
농산물을 수입할 대규모 시장도, 산업 원자재로 쓸 자원도 없는 한국 입장에서 무기화할 수 있는 카드는 결국 대체 못 할 독보적 첨단기술뿐이다. 한미 무역 협상 이후에도 미국이나 다른 강대국에서 제2의 트럼프 대통령이 언제든 나올 수 있다는 점 역시 대비해야 한다. “중국이 미국산 AI 반도체에 중독되게 해야 한다”는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의 발언은 사실 한국에 더 절실한 전략이다. 지금처럼 미국과 중국 등 다른 나라 회사가 첨단산업 생태계 최상단을 휩쓰는 공급망 구조에서는 글로벌 무역전쟁이 벌어졌을 때 한국은 매번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기업과 정부·학계가 서둘러 머리를 맞대야 한다. 우리도 강대국을 중독시킬 뭔가를 하나라도 확보해야 한다. 중국의 희토류나 미국의 엔비디아 AI 칩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