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장 '힙'한 파트너…럭셔리도, 지적인 이들에게 빠졌다 [비크닉]

2024-10-12

b.트렌드

트렌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가치를 반영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모호함을 밝히는 한줄기 단서가 되기도 하고요.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트렌드를 건져 올립니다.

지난 10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출판계가 때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는 가운데, 최근 출판시장에는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바로 패션·라이프스타일 브랜드와의 만남. 최근 젊은 세대 사이 독서가 ‘힙’한 문화로 인식되면서 이전까지 접점이 없어 보이던 두 분야가 손잡고 의류나 문구 컬렉션을 내고, 브랜드 자체 독서클럽을 운영하는 등 다채로운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다.

책과 브랜드의 진지한 만남

패션 브랜드 ‘예일’은 지난 달 30일 민음사와 협업해 라이프스타일 컬렉션을 냈다. 책 읽는 곰 캐릭터가 새겨진 의류부터 책갈피, 엽서 등 문구를 아우르는 컬렉션이다. 민음사의 간판 시리즈인 ‘세계문학전집’의 책 『위대한 개츠비』 미니 북 패키지도 포함됐다. 이호정 예일 마케팅 팀장은 “책을 매개로 더 나은 삶을 제안하고 싶다는 브랜드의 비전을 담은 컬렉션”이라며 “책을 좋아하는 20·30이 참여할 수 있는 북 토크 프로그램 등 다양한 이벤트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 2022년 민음사는 한섬의 온라인 패션 플랫폼 이큐엘(EQL)과의 독특한 협업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주제로 협업 컬렉션을 냈는데, 작품에 언급되는 마들렌과 홍차에서 따온 다양한 굿즈(기념품)가 좋은 반응을 끌어냈다. 조아란 민음사 마케팅 부장은 “판매량도 좋았지만, 그동안의 패션 이벤트와 다른 결의 진지한 반응들이 많아 브랜드 측에서도 (협업을) 만족스러워했던 것 같다”며 “기존 고객 군에서 한층 확장된 형태의 고객 군을 만날 수 있고, 보다 진지한 메시지를 내고 싶을 때 협업 파트너로 출판사를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럭셔리가 사랑한 책

지난 6월 서울 성수동에서 열린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미우미우의 팝업 스토어 행사장을 떠나는 사람들의 손에는 제각기 책이 한 권씩 들려있었다. ‘썸머 리즈(Summer Reads·여름의 읽기)’라는 타이틀이 붙여진 작은 팝업 이벤트로,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8개국에서 진행된 행사다. 미우미우는 이날 방문객들에게 제인 오스틴의 『설득』,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금지된 노트북』, 시빌라 알레라모의 『여성』 중 한 권의 원서를 아이스크림과 함께 증정했다.

아예 주요 문학상의 후원을 자처한 브랜드도 있다. 이탈리아 브랜드 발렌티노는 지난 5월 열린 영국의 문학상 ‘부커상 2024’의 공식 후원사로 이름을 올렸다. 부커상은 한강의 수상 덕에 한국에도 잘 알려진 저명한 문학상이다. 앞서 발렌티노는 밀라노 2024 봄·여름 남성복 패션 위크에서 공개한 컬렉션의 주제로 책을 활용했다. ‘더 내러티브’라는 주제로 한야 야나기하라의 소설 ‘리틀 라이프’의 구절을 그대로 새긴 재킷이나 데님 등의 의류를 선보인 것.

디올은 지난해부터 공식 유튜브 채널에 책 관련 콘텐트를 게시하고 있다. ‘더 디올 북토트 클럽’이라는 제목의 콘텐트로 유명인들이 디올의 가방인 북토트 백을 들고 등장해 책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 9일에는 소프라노 프리티 옌데가 등장해 영국 런던의 한 도서관을 배경으로 책과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 밖에도 나탈리 포트만·로자먼드 파이크 등 유명 배우들의 독서 이야기가 실렸다.

식상한 ‘아트 콜라보’ 대신 문장과 함께

최근 패션가의 책 콘텐트 범람의 배경으로는 2030 젊은 세대 사이 부는 ‘독서 힙’ ‘텍스트 힙’ 트렌드가 꼽힌다.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Text)’와 ‘멋있는’ ‘개성있는’이라는 뜻의 신조어 ‘힙(Hip)’을 합친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에 환경에 노출된 Z세대들 사이, 인쇄된 활자를 읽는 행위는 그 자체로 특별할 수 있다.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패션 업계가 이 같은 흐름을 놓칠리 없다.

범람하는 이미지 기반 마케팅 대신, 글 기반의 마케팅이 신선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그동안 패션 업계에서 가장 흔한 협업 소재는 미술 등 시각물 기반의 예술로, 각종 작가 협업 한정판 제품들이 주가 됐다. 강렬한 이미지가 주요 매개체로, SNS 등 디지털 환경에서 가장 빠르고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빠르게 소모되는 이미지나 영상에 대한 피로감이 높아졌고, 점차 단순한 이미지 소비가 아니라 보다 깊은 공감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잘 만든 사진이나 영상보다 화두를 던지는 문장 하나가 브랜드의 의도를 더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얘기다.

민음사 조 부장은 “실제로 요즘 함께 팝업 스토어를 꾸리고 협업을 하자는 제안이 과거보다 월등히 많이 들어오고 있다”며 “워낙 업계를 넘나드는 이종 및 합종연횡이 빈번한 데다, 책이나 출판 분야와 패션, 라이프스타일의 만남이 의외의 조합처럼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차분한 것이 좋아, ‘드뮤어’ 룩 바람도

당분간 패션·라이프스타일 업계에서의 ‘텍스트 힙’ 현상은 계속될 전망이다. 최근 회자하는 ‘드뮤어(Demure) 룩’ 바람도 그 연장선이다. 프랑스어로 ‘차분하다’ ‘조용하다’는 뜻을 지닌 단어로 패션에서는 주로 절제된 실루엣, 차분하고 부드러운 색상, 고급스러운 소재감 등을 표현한다. 과잉을 지양하고, 절제를 택한다는 점에서 요즘 젊은 세대의 ‘추구미(추구하는 이미지)’로 꼽힌다.

물론 책 읽기가 단순히 유행 차원에서 소비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단순히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출판사를 협업 파트너로 지목하고, 판매와 마케팅을 위한 수단으로 독서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출판 업계 관계자는 “대단한 열독가가 아니어도 자신의 SNS 피드에 책 사진 하나 정도는 끼우고 싶은 욕망이 다들 있는 것 같다”며 “출판이나 도서 시장에 관심이 높아졌다는 의미인만큼 이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기 보다 실제 서점으로, 꾸준한 독서로 유도하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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