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은 전 세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단지 일부 상인과 선교사들, 세계적 흐름 속의 정부 관리들과 학생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육이오’라고 부르는 1950년 6월25일의 비극적 사건 이후,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충돌하는 시험장이 되었다.”
격변의 구한말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였던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1902)는 서울에서 아들을 낳는다. 그의 이름은 헨리 도지 아펜젤러(1889~1953). 1900년 한국을 떠났다가 17년 만에 돌아온 도지 아펜젤러는 아버지가 세운 배제학당의 교장을 맡아 수많은 인재를 키워냈다. 하지만 3·1운동 1주년을 맞아 1920년 열린 학생들의 만세 운동을 문제 삼은 일제로부터 부당하게 쫓겨난다. 광복 이후 그는 한국에 돌아와 미군정, 6·25전쟁을 모두 지켜봤다.
서울 중구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기획한 <해방정국과 배재학당> 특별전에서 아펜젤러 2세가 격동의 한국사를 기록한 ‘내가 겪은 세 개의 한국’을 처음으로 공개한다고 17일 밝혔다.
도지 아펜젤러의 회고 글은 1951년 10월 부산에서 작성됐다. 6·25전쟁 당시 기독교세계봉사회의 한국 책임자로서 구호 활동에 나섰던 그는 ‘내 어린 시절의 한국’, ‘일본의 한국’, ‘해방된 한국’으로 나눠 그가 겪은 한국을 기록했다.
박물관 측이 연합뉴스에 공개한 전문에서 도지 아펜젤러가 일제 강점기를 묘사한 부분이 눈에 띈다. 1917년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온 그는 “1917년 내가 받은 첫인상은 부산 부두에서 일본인이 한국 인부를 발로 차는 모습을 보았을 때 불쾌한 것을 참아야 하는 굴욕감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내가 이후에 보게 될 것과 경험할 것에 비하면 가벼운 편이었다.”고 전했다.
도지 아펜젤러는 1916~1919년 조선 총독을 역임한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을 향해 ‘도살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행동했다고도 비판했다. 그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과 관련해 “민간인 불량배들의 부추김을 받아 밤마다 시위대에 난입해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총검으로 찔렀다”고 증언했다.
그는 제헌국회를 묘사하면서 “1948년 8월, 한국 최초로 국회가 삼삼오오 모여, 12시 12분 12초 즉 ‘트리플 트웰브(triple twelve)’의 시간에 국가가 태어났고, 이 국회에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가 대표로 참석하였다”고 기록했다.
그가 3·1운동, 일제강점기, 해방 정국, 6·25 전쟁에 이르는 격동기를 기록한 자료는 가족들이 박물관에 기증하면서 빛을 보게 됐다. 이번 전시에선 배재학당의 60년 역사와 교육 활동을 정리한 ‘배재환갑’, 배재 학생들의 민족운동 참여를 보여주는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운동 진술서’ 등도 함께 볼 수 있다. 전시는 내년 8월14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