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담한 공간에서 김환기·박수근·이중섭·천경자·도상봉·장욱진 등 20세기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그림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있다. 8일 개막하는 갤러리현대 ‘55주년: 한국 현대미술의 서사’ 전시다.
갤러리의 본관과 신관에 걸쳐 열리는데 본관 전시는 그간 갤러리가 다뤄온 20세기 중반 작가 24인의 그림 50여 점을 선보인다. 하나 같이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작가들의 회화로서, 비교적 작은 사이즈의 구상화와 반추상화들이다. 1970년에 현대화랑이라는 이름으로 갤러리를 창립한 박명자 회장은 당시 한국의 주거 형태가 한옥에서 아파트로 바뀌면서 집에 거는 그림도 달라질 것을 예측하고 이러한 그림들을 적극 홍보했다. 이를 시작으로 주요 작가들과 연을 맺으며 다양한 매체와 규모의 미술작품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한국의 대표 화랑으로 성장했다.
“화랑의 원조인 서구에서도 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현대미술 화랑이 현존하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고 권영숙 갤러리현대 이사는 설명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또한 우리는 대부분의 서구 화랑보다 앞서서 자체 매거진을 발행한 화랑입니다. 1970년대 한국에서는 돈 주고 사는 그림은 동양화이고 서양화는 선물로나 받는 그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해요. 현대화랑은 이러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미술전문지 『화랑』을 발행하고 오광수 평론가(훗날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역임) 등을 필진으로 섭외해 대중이 현대미술에 눈뜨게 했습니다.”
화랑은 창립자인 아트 딜러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앞서의 설명대로 서구에도 오래 존속하는 화랑이 많지 않다. 박 회장의 차남이며 2세대 화랑주인 도형태 부회장이 발굴한 작가들을 주로 다루는 신관 전시는 갤러리현대가 다음 세대로 안정적으로 넘어간 과정을 짐작케 한다. 여기에서는 요즘 재조명되는 1960~70년대 한국 실험미술 작가들과 코리안 디아스포라(재외 한국인) 작가들을 포함한 12인의 대표작 180여 점이 소개된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한국 미니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 알려진 박현기(1942~2000)의 1981년 작 ‘도심을 지나며’이다. 1981년 3월 22일 작가는 16m 길이의 거대한 트레일러 위에 거울이 부착된 3m가 넘는 인공 바위를 싣고 또 일군의 사진작가 친구들을 싣고 대구의 도심지를 40여분 간 횡단했다. 이때 거울은 마치 바위에 달린 눈처럼 주변의 풍경을 담았고 사진작가들은 그것을 촬영했다. 마침내 바위는 거리 한 곳에 내려졌고 행인들은 바위에 붙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들을 바라보며 반응했다. 작가가 거리의 CCTV를 근처 맥향화랑에 설치된 TV와 유선으로 연결해 놓아서 화랑 안 관람객들은 그러한 행인들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작가가 “태고의 시간과 공간을 포용하는 자연”이라고 부른 돌덩어리의 눈으로 현대문명과 인간을 바라보게 한 작품이었다.
이번 전시에는 그 CCTV 영상과 트레일러가 달리는 영상을 포함한 3점의 비디오가 당시 사진작가들이 찍은 사진과 함께 전시된다. 권 이사는 “박현기의 퍼포먼스 작업 중 스케일과 콘셉트 면에서 단연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작품으로, 이렇게 3개의 비디오가 사진과 함께 전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그 옆에는 실험미술가 성능경의 작품들이 있다. 그의 1970년대 대표작인 ‘신문 읽기’ 퍼포먼스를 2023년에 100명의 퍼포먼스로 재현한 영상과 함께, 2024년 12월 3일 벌어졌던 계엄령 사태가 대서특필된 동아일보 신문을 읽은 결과물 또한 전시된다.
오랜 기간 무명으로 머물러 있다가 80세 무렵부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승택(92)의 ‘비조각’ 캔버스들이 3개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광경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시각적 장관을 이루는 부분이다. 작가가 오랜 기간 모아온 한국의 옛 물건들이 캔버스에 붙어 있는데, 워낭 달린 소 멍에처럼 그 자체로 기이한 조형미가 있는 것은 단독으로 붙어 있고, 탁상시계와 한 줌의 털처럼 초현실주의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들도 있다. “작가는 전통 민속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정신을 찾으려 했다”고 권 이사는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55주년: 한국 현대미술의 서사’의 1부로, 5월 15일까지 계속된다. 5월 22일부터 시작되는 2부 전시는 갤러리현대가 1970년대 후반부터 적극 소개한 재불 화가들,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 소개한 단색화 포함 완전 추상화 작가들, 그리고 동시대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다.